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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무용단 <단>, 미디어의 선정성은 재고되어야 할 부분
    카테고리 없음 2013. 4. 14. 11:09


    애초에 없었던 논쟁, 웃지 못할 촌극


    국립무용단의 최근 작 <단(壇)>(안무: 안성수, 연출: 정구호)의 일부 노출 장면에 관해 이래저래 말들이 많다. 우선 국립무용단의 작품 중 일부의 노출 장면이 외설이냐 예술이냐 사이에 첨예한 의견 대립이 일어났다는 것은 바로잡아야 할 사실 관계 차원의 문제로 보인다. 나아가 이러한 ‘논란’은 이 작품과 본질적으로 어떤 연관성이 없다는 점에서, 사태의 논점이 상당히 흐트러졌다고 보인다.


    문제의 본질: 미디어의 선정성




    ‘아찔한 노출’,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수줍게 가린~’ 등 이와 같은 문구는 우리가 인터넷상에서 흔히 보는 사진기사의 제목들의 한 양상이다. 이는 어느 한 매체나 기자에 한정된 부분이 아니라는 점에서, 특정한 매체나 기자에 대한 비판 역시 아니라는 점을 우선 명시하며, 이러한 제목 달기가 실은 온라인상에서 일차원적인 자극으로서 클릭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텅 빈 형식의 시스템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사실상 기사를 클릭했을 때 기사 내용은 제작발표회나 시사회 등의 현장에서의 간단한 개요들의 사실(fact)들로 이뤄져 있다. 문제는 사실과는 큰 관련이 없는 제목들인 셈인데, 물론 제목 달기의 단순하고도 다양한 유형으로부터 온라인 미디어 생태계에 대한 리서치 작업과 연구가 뒤따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만 일단 그 기사 제목들이 선정성을 촉발시킬 여지들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앞선 세 가지 예에서 ‘아찔한 노출’ 같이 직접적인 단어로 드러내는 방식,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라는 문장 형태를 쓰는 일종의 서사 전략을 품고 상상의 독자를 상정하는 방식, 그리고 ‘수줍게 가린’과 같이 사진 찍힌 사람을 수동적 존재로 격하시키는 방식 등은 모두 문제가 있어 보인다.


    다소 오해가 있을 수 있는데, 현장의 기자들은 그저 사진 찍는 데 최선을 다할 뿐이다. 다만 무언가 더 선정적이고 자극적이지 않으면 클릭을 하지 않게 된 ‘미디어 자체의 욕망’이 이러한 기사의 제목 달기와 그에 대한 끊임없는 트래픽을 창출해 낼 뿐이다(그리고 이는 회사의 안위와 기자의 생계와 직결되는 문제에 가까울 것이다). 


    일종의 미디어 자체가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공허한 스크린으로 작용하는 셈이다. 가령 ‘야한 생각의 날개를 펼치는 상상의 독자’를 상정할 때 기자는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것이라기보다 그러한 시스템에 거의 무의식적으로 끌려가는 셈이다. 이러한 선정적 제목 달기의 틀에, 예술을 떠나 ‘상반신 누드의 사진 한 장’이 들어온다면, 그 답은 아마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이번 노출-신에 대한 논란을 소재로 한 기사들에서, 국립무용단 블로그에서 사진을 차용함으로써 사진 자체에 대한 선정성을 의도적으로 취하려 한 것이 아니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미 선정성 따위의 논란이 되고 있다는 문구는 또 다른 논란으로 퍼져 나간다. 막상 국립무용단 블로그에서는 논란을 삼는 어떠한 의견 제시의 예도 찾을 수 없었다.


    작품의 본질: 춤에서 몸이란



    아마 예술에서 춤의 영역이 아마 토슈즈를 신고 튜튜를 입고 추는 발레리나만을 생각한다면, ‘현대 춤’의 대부분을 놓치고 있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현대 춤이라고 했지만 이는 컨템퍼러리 댄스라는 용어를 다르게 풀어본 것이다. ‘컨템퍼러리(contemporary) 댄스’, 곧 동시대의 춤이다. 그러니 이는 기괴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편견 이전에, 오히려 현재 우리의 삶을 파고들고자 하는, 곧 동시대에 띄려고 하는 노력을 처절하게 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앞선 발레의 형태는 17세기 말~19세기 말에 행해진 클래식 발레라고 일컫는 것에 가깝다. 컨템퍼러리 발레는 토슈즈를 벗고 발레복도 벗어던지며, 클래식 발레의 동작이 갖는 상징적 의미들에 대한 사전 이해 없이 무용수의 감정을 최대치로 자연스레 발현하는 데 더 중점을 두기도 한다.


    몇 년간의 통계조사는 국내에서는 1년에 발레부터 현대 춤까지 무용 한 편도 관람하지 않는 인구가 대부분임을 전한다. 그러니 발레라는 춤의 일부의 영역, 그 중에서도 세계적으로 명망을 얻은 발레리나 강수진이 ‘대표적인 우리나라의 춤꾼’으로 대다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도 그리 이상할 것은 없다.


    현대 춤은 컨템퍼러리 발레의 예를 들었듯이 최소한의 의상만을 입고 춤을 추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기서 의상은 우리가 입는 복식과 같이 어떤 지위나 그 사람의 일상의 개성을 말해주기보다, 표현하는 데 무리가 없고 최대한 몸 자체를 잘 드러내는 식으로 제한된다. 실상 입었지만 무용수의 몸 자체라고 생각하고 그 옷 자체에 다른 의미들이 결부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뜻이다.



    춤의 특질은 ‘잡히지 않는 순간들’로서 또한 비언어로서 흘러간다는 것이다. 이는 몸을 붙잡아 둔다거나 하는 게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이는 또한 특정 신체 부위 등에서 성적 만족감을 얻음을 가리키는 페티시로 작용할 수 없음을, 곧 대상화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만약 이와 전혀 다른 차원에서, 미니스커트를 입고 공식석상에 등장한 연예인에 대한 기사에는 반드시 ‘훌륭한 각선미’와 같은 제목이 달리게 마련이다. 패션으로서 해석의 여지는 완전히 사라지고 몸은 철저히 대상화된다.


    2012년 서울세계무용축제에서도 전라 공연이 있었고, 그에 대한 호기심에 작품이 매진되기도 했지만, 관객들은 실제 그것을 보고 야하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자연스런 몸이 드러나는 춤’을 그 자체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성수 안무가가 밝혔듯 여기서 누드는 오히려 ‘달빛 아래 살색 빛’으로, 무대 전체에서 디자인되는 일부분의 요소로 작용한다. 곧 여기서 누드는 앞서 몸 그 자체를 의미하기보다는 일종의 조명이며 색채이고 한편으로 또 다른 의상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가슴팍을 끊임없이 쓸며 손을 교차시키는 것은 전체 안무에서 공통되게 가져가는 부분이다. 이는 한편 한복 자체의 결을 따라가는 것을 상기시키는데, 그런 의미에서라면 이들의 노출은 또한 ‘무형의 옷’ 그 자체를 표현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작품은 ‘단’이라는 통과의례의 관문과도 같은, 그리고 인간의 집단적 제의를 발생시키는 원초적인 장소로서의 의미를 가져온 가운데, 한 줄로 길게 늘어선 무용수들의 몸 역시 이 단을 맞아 시차적인 움직임과 흐트러짐을 통해 갈등과 균열을 형태적으로 드러낸다.


    안성수 안무가는 몸 그 자체를 정교하게 쓰며 배치하는 안무가에 가깝다. 그와 손을 잡은 정구호 디자이너는 그의 직업 특성상 시각적인 눈이 뛰어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국립무용단은 한국무용의 기본기가 최상으로 축적되어 호흡과 선을 만드는 데 탁월하다. 이 안무와 시각 디자인 및 춤이 만나며 이 작품이 탄생했다. 이 과정에서 단순히 동작에 대한 강조만이 아닌 색의 대비를 통한 주제를 드러내고자 했던 의도가 ‘살결’이라는 또 다른 빛과 색, 의상을 가져가게 됐던 것으로 보는 게 맞다.


    애초의 물음: 논쟁이 됐던 진짜 부분



    9일 프레스콜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는 가령 이런 질문도 나왔다. ‘굳이 왜 벗어야 했냐’는 식의 질문, 이는 기자의 작품에 대한 의견과는 별개로 이러한 부분이 부각될 때 일어날 수 있는 논란에 대한 합리적 이유를 안무가의 입장에서 전해 듣고자 한 것이었고, 그에 대한 답변은 곧 앞서와 같았다. 단지 작품을 위한 선택이라는 것.


    애초 국립무용단의 파격행보라는 식으로 이 부분은 프레스콜이 열리기 전 며칠 전에 먼저 조망이 됐다. 한국 사회가 누드에 대한 금기 의식이 서구 등에 비해 훨씬 더 강한 측면이 있고, 또 국립 단체인 만큼 보수성이 강할 수밖에 없다는 모종의 시선이 거기에 겹쳐 있었고, 그래서 일단 이러한 행보가 국립무용단의 변화를 꾀하고자 하는 절실한 움직임이며 또한 주목해야 할 부분이라는 견지에서 이 기사는 쓰였다고 보인다.


    앞서 예술이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몸을 드러내는 측면에서 누드, 그리고 흘러가는 순간들의 움직임에서 극히 짧은 이분 정도의 시간 동안의 누드가 관객들에게 과연 선정적으로 비쳐졌는가는 재고의 여지가 없다고 보이지만, 그러한 질문은 애초에 이번 논쟁에 빠져 있는 게 사실이다.


    무대에서는 참 많은 것들이 일어난다. 그 속에서 자연스러운 것들도 단지 절취되어 현실의 필터에 걸리면 외설이 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70년대 양희은의 ‘아침이슬’이 금지됐던 것처럼 예술에 가해진 폭력과 미리 재단(裁斷)하는 시선은 이번 일과 같은 경우에 ‘벗는 것이 어떤 특정 의도를 띤 것’이라 단정되어 드러난다. 


    따라서 이번 논쟁으로 포장된, 그래서 논란을 삼음으로써 논란이 된 이번 일이 이 작품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음을, 실은 미디어의 선정적 필터에 걸린 오차 어린 해프닝임을 명확히 하고자 한다. 작품에 대한 접근 대신, 미디어의 선정성과 예술에서의 자연스런 누드의 차원을 엮어 구구절절 설명하는 기자의 신세가 참 한탄스럽기만 하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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