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영화 <피에타> 리뷰, '불가능성의 구원을 이야기하다'
    카테고리 없음 2012. 9. 5. 11:00

    ▲ 영화 <피에타> 스틸 [사진 제공=NEW] (이하 상동)

     냉혹한 사채 청부업자 강도는 예의 엄청나게 불어난 돈을 받으러 가서 끔찍한 순간의 신체 형벌로 상대를 불구로 만들고 보험금을 받아 그 돈을 갈음한다. 피에타의 전반은 이 건조한 형벌의 집행과 무기력하게 그에 당하는 힘없는 자들의 모습을 어둡게 그려낸다.

    어둠 속 강도 역의 이정진의 눈은 악마의 시선으로 묘사되지만, 실상 두려움과 공포를 야기하지는 않는다. 메두사의 머리는 그것을 보는 순간 즉시 온 몸을 굳어버리게 해서 죽음에 이르게 하지만 이 공포는 형용할 수 없는 것, 얼어붙게 만드는 것, 그래서 매혹적인 그 무엇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정진의 시선은 영혼 없는 무엇이다.

    그의 상대들이 그와의 부조리한 계약에 항거할 수 없듯 어떤 정이나 따스함도 여기에는 스며들 수 없으며, 동시에 그의 삶은 다가올 것도, 지나간 것의 추억도 없다. 곧 메두사의 머리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혼란스럽게 유동하게 만드는 힘을 가진다면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 그의 시선은 그저 죽음 그 자체이다.

    이 영혼 없는 존재자는 그래서 구원의 불가능성을 야기하면서 또 그로 인해 구원을 가능케 한다. 즉 구원이란 절대적으로 현실의 불가능함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처음에 "미안해 널 버려서……"라고 갑자기 다가와 우수에 찬 듯 또한 천진난만함을 실은 천사의 눈망울을 지닌 여자(조민수)의 등장은 그래서 인간보다는 신의 차원에서 이 영화가 전환의 계기를 맞는다는 생각에 들게 한다.

    신은 타락한 인간을 물에 빠뜨려 죽였거나 또 불에 태워 죽일 것이라는 예언은 여기서 작동되지 않는다. 오히려 신은 타락한 자식을 보듬고 사과를 빈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종교적인 색채에 근접하면서도, 이는 일반적인 종교에서의 신의 능동과 인간의 수동의 심급을 나누는 것과는 정반대로 작용한다는 점에 상응한다.

    실제 그 속의 존재의 관계들은 모두가 상처 받은 존재들이며 또 그래서 누가 더 우월하다거나 일방적으로 관계를 지배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리고 마치 이 영화 속 신은 인간보다 기꺼이 더 낮은 차원으로 내려온 것만 같다.

    조민수가 어머니로서, 이정진을 절대적으로 감싸는 장면들은 이 영화가 가진 다른 차원의 진실을 위한 부분으로서, 새롭게 영화는 전환의 계기를 맞는다.

    반전으로 소개되는 부분을 소개할 수는 없지만 이 영화의 중요한 것은 역시 타자들과 우리가 관계 맺는 방식에 대한 직접적인 성찰에 가깝다.

    김기덕의 영화에서 꽤 유명한 배우들이 그와의 작업을 자처해 왔지만 기본적으로 그의 영화 속 배역들은 정상의 경계를 훌쩍 벗어나 있다. 그의 영화에서 오해받고는 하는 실상 그 소수자들의 삶이 윤락가를 그리든 해병대를 그리든 특정한 영역에서 상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근원적인 측면에서의 소외와 고통을 그려내며 인물에게서 나아가 우리 내부로부터 균열을 일으키는 보편의 영역을 만든다는 것이다.

    곧 타자의 문제는 가령 이 영화에서는 청계천 작업장이라는 이제 헐릴 위기에 처한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의 역사적 흔적을 담고 있는 공간 속에서 힘겹게 삶을 영위하는 노동자라는 소수자의 특정 영역에서부터 출발하지만, 오히려 미래가 없는 평평한 마음에서 어머니라는 빛이 다가옴으로써 자신의 죄를 거기에 비춰보게 되는 남자의 균열로 나아가게 된다.

    이제 미래의 희망과 과거의 죄의 흔적들 사이에서 그의 현재는 요동한다. 동시에 아무도 옆에 없는 자신의 지난 자아와 가족이라는 관계망 속의 존재로서 역시 요동한다.

    이제 불구가 된 사람들은 ‘타자’로서 그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레비나스의 윤리학을 따르자면 타자란 그렇게 자신의 삶 바깥에서 그의 삶을 흔드는 존재들을 가리킨다. 우리가 지하철에서 흔히 지나치는 군중은 단지 타자가 아닌 타인일 뿐이다.

    이 고통 받는 타자들은 김기덕의 영화를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장치이다. 보통의 영화에서 주인공의 성공 그리고 그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매우 구성적인 이야기의 틀 속에 진행되는 것과는 달리 이 타자는 주인공이 있더라도 그를 중심으로 두지 않는 가운데 불쑥 나타나고는 한다.

    김기덕 자신이 늘 사회에서의 타자, 또한 그 자신의 삶에서 타자로서 방황했기 때문일까. 그 타자를 드러내는 방식은 놀라울 정도다. 앞서 유명한 배우들이 그의 영화를 장식했다고 하지만 그의 영화 속 많은 인물들이 매우 신선한 얼굴들이다. 아니 우리 현실의 인물들 같은 놀라움을 준다.

    영화 <해안선>에서 강 상병 역의 장동건이 총칼을 휘두를 때 놀라는 시민들은 매우 생경하게 (타자로서) 그 안에 위치하는 장동건의 모습을 감싸고 있는데, 그 시민들은 우리의 모습과 같은 생생함이 있었다. 이번에도 군중 속 조민수와 이정진, 두 인물이 두드러지는 신이 있는데, 이 안에서 그들을 만나는 시민 둘의 모습이 꽤 생생했다. 이런 사소한 것들이 개인적으로는 다른 주요 장면에 못지않게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다.

    곧 김기덕의 영화는 일종의 서사나 내러티브의 전형적인 전개를 따르지 않는다. 타자는 사건으로 불쑥 드러나기 때문이다.

    김기덕 영화의 베니스 영화제의 선전을 기대하며, 해외 영화제에서의 호평과 선전에 따른 유명세에 의존하기보다 영화 자체를 순수하게 만나며 김기덕 감독 자체의 삶의 문제의식들에 감응할 수 있었으면 더 좋을 것 같다는 바람이다. 그의 영화는 전작과 겹쳐지는 순일한 무엇이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은 언급할 수는 없지만, 왠지 그의 영화 <나쁜 남자>를 떠올리게도 하는 일면도 있다. 어쨌든 너무 처연하고도 아름다운 장면임에는 틀림없었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