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준 2018.10.10 09:33

▲피에트로 마룰로(Pietro Marullo)/인시에미 이레알리 컴퍼니(INSIEMI IRREALI Company), <난파선-멸종생물 목록>: ⓒCreamart[사진 제공=SIDance](이하 상동)Company), <난파선-멸종생물 목록(WRECK-List of Extinct Species>: ⓒCreamart[사진 제공=SIDance](이하 상동)

작품 설명에서 언급되는 ‘아르테 포베라’는 60년대 말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느슨한 동인의 성격에 가까운 미술 조류로, 표면적으로는 ‘비천한 오브제’(할 포스터)로 귀결되지만, 재료 자체의 재현적 기능을 담보하는 대신, 오브제를 사물 자체로 소급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미니멀리즘의 현상학적 체험에 상응하는 부분이 있다. 가령 1969년 줄리오 파올리니의 “사방 벽에 동일한 흰색의 캔버스를 서로 바라보도록 배치”한 <네 개의 동일한 이미지>의 캔버스가 “많은 다른 것들을 깨닫게 하는 매개물일 뿐이다. 물질성이 제거된 캔버스의 현존은 무한대의 범위로 시야를 넓히기 위한 매개물로 사용”된다는 작가의 말을 따르면, 이는 조금 더 명징해지는데, 여기서 오브제, 나아가 오브제가 확장하는 공간과 짝패를 이루는 건 그와 마주하는 관람색이다.


<난파선-멸종생물 목록>이 어떤 의미에서, 가령 시대적인 맥락과 결부되지 않고 사용되며 단순히 미적 형식의 유사성을 빌린 것인지, 자신의 국적인 이탈리아라는 지정학적 맥락을 공유하며 사용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거대한 검은 비닐 오브제가 무대를 뱅글뱅글 천천히 이동하는 움직임은 무대의 칠팔십 퍼센트를 차지하며, 이는 단순히 무대 전반을 차지하기 때문에 압도적이라기보다 기이한 공간의 부피를 유동적으로 상정하기에 당혹스러움을 주는데, 이는 어느 정도 ‘인간’의 통제가 원격으로 혹은 직접 접촉을 통해 이뤄지는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에 기인하지만, 단순히 그 구현 자체가 아닌, 그 형체 자체가 나타내는 존재성에 있다. 오히려 그러한 존재성이 보이지 않은 인간과의 연루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전면에 나타나는 거대한 오브제가 공간 자체로 나타났다 조금 멀어지며 한갓 측정 가능한 커다란 비닐봉지로 축소되는 이동 가운데 나체의 사람 한 명씩 오브제와 바닥의 틈에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역시 작품 설명에서는 ‘괴물’로 비유됐지만, 거대한 오브제는 지젝이 이야기한 “대상으로서의 오드라덱”을 떠올리게 한다. “세대를 초월하여 (세대의 순환에서 제외되어) 불멸이며, (성차의 밖에 있으므로) 유한성의 외부이고 시간의 외부이며 어떤 목표 지향적 활동이나 목적, 효용도 보여주지 않는다. 이는 체현된 주이상스이다.” 오브제가 검은 무대라는 한정된 시간 안에서 거대한 부피로 체감시키는 건 시간의 망각을 통한 시간 바깥이며, 또한 언어가 없고 인간을 닮지 않으나 어떤 식으로든 그 자신을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드러내는 오브제는, 그 스스로의 목적성을 인간 조종자의 의도로 환원시킬 수 없는 동시에, 그 자체가 가진 움직임의 의도를 우리 역시 파악하는 데 실패하고 마는 것이다.


‘난파선-멸종생물 목록’이라는 단어 역시 모호한데, 오브제를 ‘난파선’으로, 나체의 사람들을 ‘멸종생물’로 두며 둘의 이상한 공존을 설명하는 것은 간단한 방법이기는 하다. 오브제가 공간으로 비춰지는 차원은 그것의 물리적 크기에 기인하는 바이기는 하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붉은 조명에 따른 결과이기도 한데, 오히려 조명은 공간을 검은 오브제와 배경의 경계를 나누며, 그 배경까지를 물질적인 부분으로 채우는 효과가 있다. 곧 빛은 시각적 표피를 기록하는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밀도로 확장된다. 또 하나의 빛, 스트로보스코프 조명은 도무지 움직임이라고는 없던, 포즈를 취하는 정도에서 그쳤던 사람들이 움직이고 이어 ‘난파선’을 관객석 위로 떠 보내고, 이어 무대 끝을 찍고 관객으로부터 되돌아온 그것을 쭈그러뜨린 후 떠난 일련의 과정에 이어 움직임들은 밀도를 갖는 포즈들의 현현을 만들기 시작한다.



가령 에드바르트 뭉크의 <절규>를 떠올리게 하는 경악하는 포즈는, 조명에 의해 포획된 순간의 연장이라는 점에서, 오직 그 차원에서만 물질적으로 공명한다는 점에서 움직임의 잠재적 힘을 가지고 있다. 오히려 순간을 순간의 크기로 연장하는 조명에 의해 안무는 완성되고, 앞선 포즈들 역시 그와 함께 계열화되며 의미를 얻는 것이 가능하다. ‘난파선’ 뒤로 드러나는 일단의 포즈들은 힘든 것이라 말할 수 있었지만, 어려운 것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곧 움직임 자체가 갖는 특이성과 미적 특질이 존재하지 않고, 나체라는 재료를 나열하는 데 가깝다. 이를 질료로 바꾸는 건 그들의 움직임에 더해진 조명이다.

그렇다면 그 봉지, 이후 공기가 빠지고 입체가 아닌 쭈글쭈글해진 면으로 변한 오브제는 무엇을 의미, 아니 상징하는가. 더 이상 사람 그 자체라기보다는 퍼포머로 거대한 빈 공간을 검은 면으로 채우고 변환하는 이들의 행위에서 이를 판단할 수 있다. 그것을 들고 숨어서, 보이지 않는 그들의 앞모습을 검은 면의 찰랑거림과 무늬로 바꾸는 것이나 그것을 든 그들의 뒷모습으로 그 반대편을 보이지 않게 상정함은, 안과 밖의 뚜렷한 경계를, 그리고 그것이 각각 합치되거나 구분되는 순간들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그들은 보이지 않으나 아마도 우리와 적대하지 않은 존재들이거나 그들은 우리에게만 보이나 아마도 우리와 그들을 향한 누군가의 적대를 체현하고 있는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와 마주서거나 우리의 앞을 가로막으며 제3의 세력을 존재하지 않게 하거나 존재시키기 때문이다.

이들이 검은 면을 버리고 극장 측면에서 부스럭거리며 부풀린 오브제를 다시 가져오며 그것이 사라지는 것을 응시하다 사라지는 장면은, 단순히 감상적 여운을 주는 클리셰적 결말을 가져가기보다는, 반복적으로 생성되고 순환되는 이상한 대상의 힘과 그와 결부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역학을 상징하기 위한 장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브제 자체의 움직임을 춤으로 격상시키고, 신체 자체를 재료로 주조하는 조명과 같이, <난파선-멸종생물 목록>은 움직임의 차원을 새롭게 기입하는 바 있으며, ‘난민’과 같은 타자의 현실을 ‘안과 밖’이라는 상징적인 차원에서 처리하며 감상적으로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그 크기와 독특한 느린 움직임으로 현상학적 체험을 유도하는 바 역시 유효하다고 하겠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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