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준 2017.12.29 16:38

남동현, <핑크색동굴 그리고 반도체>: 유령 관객의 산출

남동현, <핑크색동굴 그리고 반도체> ⓒSang Hoon Ok (이하 상동)

남동현의 작업에서 6개의 영상은 6개의 시점-장소에 자리하는데, 처음 5개의 장소는 입장 전 접속한 유투브의 사운드와 동기화된다. 문래예술공장 극장 2, 3층에 분포된 영상들의 소리 간섭을 없애기 위함인데, 유투브 주소를 현장에서 전달받기는 하지만, 사실상 사운드가 없는 현장의 전시 영상들을 완성시키는 이미지가 없는 영상은 따라서 장소 특정적으로 발현된다고 하겠다. 영상을 따라 관객은 극장을 통과해(‘극장 측정’) 자연스레 사운드와 영상이 합치된 극장의 스크린 앞에 위치하게 된다.

영상과 사운드는 엄밀히 온전한 조응을 이루지 못하는데, 이는 영상과 사운드(-영상)의 시간의 차이-아마도 이동의 시간을 고려한 것일까-도 있지만, 사운드가 영상의 외화면에 위치하는 가운데 영상은 대상을 포착하는 카메라의 시선으로 소급되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사물은 너무 멀리 있거나 때로 가까이 있어 그것과의 거리는 마치 심리적인 거리를 유지할 수 있게 한다. 웹상에서 편지를 주고받는 여자와 남자를 통해 가상의 존재로 체현되는 관객에게 비어진 배경과 흐릿한 사물의 불투명함은, 현실로부터 소멸되는 존재를 출현시킨다.

나와 현실 사이의 텅 빈 배경, 곧 카메라의 거리만큼 나는 자율적인 존재인 동시에 현실로부터 불명확한 위치로 남는다. 나와 너는 엄밀히 현재가 아닌, 서버 안에 임시적으로 편재되며 존재한다, 동시에 사라진다. 첫 번째 영상의 동굴은 그런 의미에서 서버에 대한 은유이다. 분홍빛 동굴은 현실적이 아니라 현재적이다. 나와 너는 흐르면서 현재적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서버로부터 탄생된다. 그리고 두 존재는 얼굴을 드러낼 수 없다. 가상의 메일을 목소리로 변환시킨 사운드는 “삭제”에서 버벅거리며 소멸에 대한 저항감 혹은 두려움을 표한다.

둘의 만남의 약속을 했던 어린이대공원은 마지막 영상에서 처음부터 그랬듯이 단지 시점으로만 실현된다. 몇 차례 찾았던 동물원의 동물이 자신을 기억할 수 있을까란 질문에서 드러나듯 기억은 존재를 보증하지 못하며 존재는 희미하게 자리한다, 동물이 기억한다면 그것은 그 스스로에게 아마 뒤섞이는 얼굴이거나 본 것도 같은 얼굴일 것이므로. 그러니 나란 존재를 보증하는 건 실제 현실도, 기억도, 너의 몸/얼굴도 아니고, 너와의 대화, 너의 말일 뿐이다. 곧 관객은 그들의 목소리를 듣기보다 그 목소리에 의해 현실(영상)로 불투명하게 매개된다.

황수현, <돌아보지 않기>: 몸이 극장이 되는 방식

황수현, <돌아보지 않기> ⓒSang Hoon Ok (이하 상동)

황수현은 극장이 된다. 극장은 황수현의 몸에 있다. 극장이 열리는 순간 몸은 극장의 한 위치에 묶여 있고. 말은 몸의 좁은 틈에서 간헐적으로 생성된다. 작업의 제목은 관객에 대한 지침이자 주문이다. 시야가 제한된 좌석들의 분산 배치에 따라 관객이 묶이자 비로소 극장 전체를 이동하는 황수현을 관객은 시점에 따라 온전히 볼 수 있거나 온전히 듣기만 해야 한다. 그러나 제한된 시점은 황수현이 목소리를 뒤틀린 몸을 통해 짜내듯 냈던 것처럼 어색하고 답답한 일이다. 그럼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 한 관객은 모든 부분을 보기는 힘든데, 이때 보이는 건 다른 관객(의 반응)이다.

황수현이 준 두 번 정도의 큐, 곧 무엇이 시작된다거나 무엇을 시작한다는 말들은, 맥거핀 같다, 극장과 몸이 연동된다는, 스스로가 극장이라는. 그러나 그것은 극장의 끝까지 연장된다고 보이지는 않는데, 다만 극장 중간에 황수현이 당도했을 때 그 옆에서 하얀 점토 같은 덩어리가 떨어지는 하나의 순간이 있다, 그것은 큐의 늦은 도착일까. 전체적으로 동작들은 지체되고 채 펼쳐지지 않거나 버벅거리고, 때로 (목)소리와 몸은 싱크를 맞추지 않는다.

싱크의 불일치는, 첫 번째 장면에서처럼 목소리가 몸에 붙들려 떨어져 나오는 현상, 몸과 목소리가 온전히 연동되지 않는 현상의 연장선상에 있다. 황수현은 곧 극장을 앞당겨 쓰거나 뒤로 유예시킨다. 공간적인 지체의 편재와 큐의 선취를 통해. 공간의 편취와 혼재를 통해 극장은 전체가 또는 반쯤만 드러나는 가운데, 시간은 과정의 흐름이 아닌, 절취된 기억으로, 기-기억으로, 미리 오는 기억으로 분산된다. 이는 시공간의 분산을 구성한다.

한편 관객은 ‘돌아보지 말라’는 원칙에 따라 몸의 뒤틈의 고통과 몸의 뒤틈에 대한 유혹 사이에서 있다. 황수현이 큐를 앞서 주었을 때 시간적으로 뒤로 밀려 움직임이 발현된다면, 황수현이 뒤에 있을 때는 극장은 공간적으로 뒤로부터 도취된다. 보이지 않는 신체, 그러나 즉물적인 신체(-사운드)는 분명히 그려진다. 그리고 이는 앞서서 또 이후에 구현된다. 어쩌면 사이렌의 소리로부터 스스로를 결박한 오디세우스의 주문(『오디세이아』)을, 극장 안에서 의자의 제한된 각도의 배치라는 장치로써 구현해본 작업이랄까.

정세영, <Cues>: 극장을 지정하는 형식

정세영, <Cues> ⓒSang Hoon Ok (이하 상동)

정세영은 극장의 관습적 태도를 가시적으로 확충하는 작업을 이번에도 선보인다. 이 퍼포먼스는 탁구대를 갖다 놓고 탁구공의 자동 발사 장치가 길어 뱉는 탁구공들을 쳐내는 작업이 전부이다. 속도와 높 조정을 통한 기계의 타점 변경, 그리고 탁구대의 위치 이동을 통해 탁구공을 치던 퍼포머는, 네트에 걸려 돌아오는 탁구공을 바라보는 것으로, 다시 탁구대의 앞쪽으로의 이동과 함께 벽을 타격하는 것으로 이동하며 뒤로 비켜 나 있게 되는데, 곧 퍼포먼스는 탁구의 여러 변신의 흐름을 시각화한다.

탁구가 기계 장치를 통해 파트너(퍼포머가 없어도 된다는 것)를 가정한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서 나아가, 행위가 실패하며 행위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결과들(네트에 걸리거나 벽이 자신을 대신하거나)을 통해 두 명의 퍼포머의 자연스런 탁구의 행위 자체에 연접된다. 상징계를 한 번 비튼 시각으로 제시하는 것이 정세영의 작업이랄까(‘이런 것들은 너희가 이런 식으로 보고 있었던 거야.’). 여기서 물리적으로 일관되게 발생하는(무대에 끝까지 충실하게 남는) 건 퍼포머의 행위가 아닌, 뿜어져 나오고 튕겨 나오는 사운드다. 그것을 인식하는 것은 결국 이 퍼포먼스의 (비)가시성을 측정하는 정확한 지표를 선취한 것이 될 것이다.

차지량, <B.G.M>: ‘극장과 개인’으로서의 알레고리 

차지량, <B.G.M> ⓒSang Hoon Ok (이하 상동)

차지량은 2012년 오케스트라를 본 기억을 재현한다. 극장 뒤편에서 라이브 연주와 마이크로 내레이션을 넣는 가운데 스크린상에서 그래픽 이미지와 사진으로 극장의 크기를 재현하고, 스크린 앞에 자신을 대리한-차지량의 어떤 평소 차림새를 재현한-퍼포머를 위치시킴으로써, 장소와 말, 존재는 삼위일체를 이룬다. 연극의 3요소를 세우는 것으로써 연극은 이뤄진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차지량은 형식으로서의 연극을 통해 극장을 측정하려 했다기보다는, 극장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미래로 나아가고자 했음이 더 크다고 보인다.

극장은 여기서 하나의 멜랑콜리로, 사라지지 않는 그 무엇이다. 극장에 대한 사적 기억을 다룬 이 작업은, 개인 안의 편재(기억)되는 극장으로 소급된다. 극장은 그의 보이지 않는 역사였고, 그의 어둠의 근거이자 어둠 자체의 메타포였다. 그 반대편에서 극장 바깥 그리고 하얀 구름을 대면하는 장면은 전치된 메타포라 하겠다. 이러한 자기 고백은 그 스스로가 다시 미래의 관객 속의 관객(으로서의 자신)으로 사라짐을 표명하는 종결로 급선회한다. 그럼으로써 관객(=차지량) 바깥의 관객을 호명한다.

2012년과 2017년 사이에서, 사라지는 퍼포머와 사라지고 있는 목소리로부터, 관객은 시점적으로/시간적으로 유예된다, 곧 남겨진다(‘관객은 차지량을 찾던 자신을 발견한다’). 관객의 극장 바깥과 극장 이후의 삶은 앞당겨진다. 장소, 존재, 말은 하나씩 차례차례 사라지는 가운데, 연극은 빼기를 감행하고 관객을 더하기한다. 아니 애초 이 퍼포먼스는 연극을 가장한 비-연극이었다, 아니 거꾸로 연극의 빼기를 통해 ‘연극(이라는 개념)’을 구성한다.

차지량은 스크린과 마이크를 관객에게 돌리면서 사라진다고 할 수 있다, 관객으로서 사라지지 않음을 표명하면서. ‘관객 속의 관객’이라는 메타포는 차지량과 관객을 보이지 않게 결속한다. 그리고 ‘극장 바깥’은 극장의 외부가 아니라, 과거 기억 속 희망이 아니라, 다른 극장, 곧 미래의 극장으로 소급된다. 그렇다면 멜랑콜리의 기억은 이 안에서 수행적으로 종결된 것일까. 그것은 한 명의 관객, 그리고 관객 바깥의 관객과 각각 함께 사라진다.

《Turn Leap:극장을 측정하는 작가들》 포스터

P.S. 극장은 의식(남동현)으로, 몸(황수현)으로, 물리적 거리(정세영)로, 기억(차지량)으로 측정된다. 나아가 사유(장현준)로. 물론 이는 극장에 대한 사유로 수렴된다거나 극장의 다른 활용으로 직접적으로 연장된다거나 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측정’은 즉물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에 닿아 있는 듯한 개념이다. 이러한 개념은 ‘남산 아고라 2017’의 <불편한 입장들>(에서 ‘2015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제작한 ‘경기권역 영화관 장애차별금지법 이행 모니터링’을 기반으로 재구성한 남산예술센터 시설 접근성 모니터링을 위해 모집된 관객들이 공연장 곳곳을 둘러보면서 시설이 규격에 맞는지 직접 측정’했던 퍼포먼스)에서 나타난 바 있다[이는 극장 ‘자체’를 새롭게 사유하는 데 이른다. ‘(지금까지의) 극장은 극장이 아니(었)다!].

‘극장에 들어서는 연습’(“무용수를 비롯한 안무가들은 약 6개월, 1년의 연습 기간을 거쳐 극장에 들어”갔다)을 통해, 결과적으로 《Turn Leap:극장을 측정하는 작가들》은 사회적이거나 제도적인 측면에서 극장의 비가시적 측면을 드러낸다기보다는, 극장을 텅 빈 장소로 두고, 극장의 본원적인 개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극장은 여전히 극장이거나 극장일 것이라는 것은 그보다 공고한 진리로 보인다. ‘모든 것은 극장이고 극장은 극장을 넘어서는(극장으로 표현되지 않는) 그 무엇이다.’

“가장 작은 기본 단위”(양은혜)로서의 극장은, 극장의 결과를 산출하기보다 극장의 시작을 선취하고자 한다. 곧 극장은 채워진 것(‘리얼리즘의 무대’)이 아니라 채워지는 것(‘공유되는 실재적인 장소’)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공간을 인식적으로 측정한다. 극장의 물리적 거리를 관계의 필연적인 틈으로 형상화하며 극장의 개념을 제안하거나(장현준), 영상과 사운드를 합치시키는 이동-관람을 통해 극장의 동선을 구성케 하거나(남동현), 선택/제한적인 시점의 좌석들로 퍼포먼스를 반쯤 더하면서 빼며 시청각적 공간 구성을 타진하거나(황수현), 장치를 시각화/존재화하며 퍼포머 없는 무대의 충만함을 드러내거나(정세영), 관객이라는 해체(‘개인’)와 관객이라는 종합(‘종합’) 사이의 느슨한 틈으로 사라지거나(차지량) 하며.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공연 개요]
공연명 Turn Leap:극장을 측정하는 작가들
일시 2017년 12월 26일~27일,
전시 15:00~18:20, 공연 19:00
장소 문래예술공장
작가/작품명 남동현<핑크색동굴 그리고 반도체>, 정세영<Cues>, 황수현<돌아보지 않기>, 차지량<B.G.M>
소요 시간 약120분(인터미션포함)관람
연령 전체관람
기획 양은혜
정보 페이스북페이지 (Turn Leap:극장을 측정하는 작가들)https://goo.gl/forms/ZwXiMLbqDjv9FZzC3
후원 서울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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