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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다슬/요하네스 칼, <당신이 그것에 대해 알고 싶었던 모든 것>: ‘말하기로서의 움직임’
    REVIEW/Dance 2017. 11. 20. 18:13

    정다슬(왼쪽), 요하네스 칼, <당신이 그것에 대해 알고 싶었던 모든 것>ⓒ조현우

    남성의 포즈들은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 <올랭피아>(1863)와 <풀밭 위의 점심 식사>(1863)의 여성 누드의 모습들을 포즈를 입체적으로 옮기는 가운데 상정한다. 남성이 여성을 표상하며 동시에 여성이 아닌 남성 관객을 보는 것은, 재현적 섹슈얼리티를 수행적이고 비판적인 언어로 전유하는 것이다. 이어 남자는 섹스/자위가 오로지 정액의 배출이라는 최종 결과에만 향해 있음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데, 성적 쾌락은 따라서 일정한 절차와 일관된 결과라는 성질을 갖는다.

    요하네스 칼, <당신이 그것에 대해 알고 싶었던 모든 것>ⓒ조현우

    두 퍼포머는 대부분 말과 움직임이라는 구분된 역할, 동시에 평등한 역할 놀음으로 무대를 채운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상관없이, 그러니까 기존의 남성과 여성에 대한 편견에 저항하며. 예외적으로는 자신의 작달만한 신체 부위들을 가리키며 이것이 아름다운(schön) 것으로 인식되느냐는 질문들을 퍼붓는다.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수행적으로 전유될 수 있음-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의 전제-은, 이 작업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정다슬, <당신이 그것에 대해 알고 싶었던 모든 것>ⓒ조현우

    요하네스 칼(Johannes Karal)의 첫 번째 포즈들과 종종 무대를 휘저으며 걷는 움직임들은 여성의 움직임에 가깝다는 인상을 주는데, 정다슬의 신체 부위들을 가리키며 해체시키는 지시 행위들은 칼의 첫 번째 포즈들에 대한 관조적 시선(에 빗금을 치는 행위들)을 완전한 철회를 완성한다. 옷을 입은 누드로, 위화적이지 않은 시선으로, 관능적인 몸짓들의 전환으로 드러나며 역사의 이미지를 환기시키던 행위들은, 곧 들리지 않지만 이것이 ‘이미지’임을 말했다면, 정다슬과 칼이 관객석을 휘저으며 묻는 행위들, 그것의 끝없는 ‘차이들의 순수한 반복’(곧 제한 없는 신체들의 분절됨은 모든 신체를 자의적인 명명 체제 자체로 변환한다)은, 이미지를 분절하고 파편으로 만든다.

    ▲ 요하네스 칼(왼쪽), 정다슬, <당신이 그것에 대해 알고 싶었던 모든 것>ⓒ조현우

    떠돌아다니는 신체 부위들은 일시적으로 포획되면서 다음 명명에 의해 사라진다. 처음 칼이 자신의 이야기를 연극 대사인 양 했던 장면에서 어둠 속으로 어슴푸레 사라졌던 정다슬의 움직임이 주체인지 대상인지 온전히 독해 불가능했다면, 다른 움직임들-주로 칼의 움직임들, 그리고 대표적으로 둘이서 오로지 소진을 위한 목적의 끊임없는 점프 장면들-은 성행위를 표상하는 것들로 자리하는데, 이런 행위들은 움직임의 심미적 몰입 자체에 온전한 의의를 두는 대신 지시 기호로서 움직임들을 두는 것에 가깝다. 따라서 물음으로 점철된 작업은 움직임 자체에 대한 탐문이기보다는 움직임을 통해 상징적인 것들을 재상정하거나 말하기의 대상으로 몸을 수렴시키며 발생하는 비판적 말하기의 방식으로 온전히 쓰인다.

    ‘당신이 그것에 대해 알고 싶었던 모든 것’이라는 제목은, 결국 성에 대한 피상적인 앎에 대한 욕망을 갖는 평범한 개인으로서의 관객을 표상하며, 공연 전반이 보여주는 진부한 앎의 나열을 그들(‘당신’들)에게 확인시킨다. 곧 이 작업은 브레히트의 ‘소격 효과(Verfremdungseffekt)’라는 견지에서 볼 수 있는 작업으로, 작업의 재미는 생경한 지시를 통한 낯선 명징한 기호들에 대한 진부하면서 진부함을 격파하는 독해일 것이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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