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준 2017.11.13 21:16

움직임은 음악을 ‘온전히’ 상쇄할 수 있는가?

▲ 국립현대무용단 픽업스테이지 <슈팅스타>(2016년, 스위스에서 초연됐으며, 국립현대무용단과 협업하며 음악, 무용수, 의상 등이 모두 새롭게 바뀐 공연으로 무대에 올랐다) 연습 장면, 김서윤/매튜 리치/유다정/임소정/표상만/허준환 BAKI [사진 제공=국립현대무용단] (이하 상동)

처음 어둠의 가림 막 너머 등장한 무용수(김서윤)의 한결같은 움직임(의 궤적)은 작품의 본원적 움직임을 응축하고 예고한다. 끊임없이 안으로 말려들며 다시 시작되는 지점을 드러내지 않는 순환적 움직임, 곧 분절화되지 않으며 멈추지 않고 어느새 다시 원점을 가리키고 있는 반복되는 움직임은, 한편으로 음악을 입고 음악을 지운다. 이는 이후 여섯 명까지 불어나는 그야말로 무대의 혼란 이전에, 거대한 음악적 장을 (‘하나의’) 몸은 어떻게 포용/적응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를 에워싸고 활을 쏘는 동작으로 접근하는 여러 퍼포머들 이후, 블랙스트링[Black String, 거문고 연주자 허윤정(리더), 기타리스트 오정수, 대금 연주자 이아람, 타악연주자 황민왕이 이룬 팀]의 음악은 중심으로의 집중을 거두고 흩어진다. 무용수들은 한 곳에 모여 쓰러지는데, 여기에는 해체가 선행된다(이는 일렉트로닉 기타가 중심을 차지하면서부터이다). 곧 중심을 잃어 중심에 결과적으로 모여 있는 형국인 것이다. 그 이전은 어떠한가. 곧 거대한 음악은 몸과 줄다리기를 하듯 몸과 평평한 긴장을 유지한다. 몸은 음악이 새기는 거대한 빈 공간을 그대로 두고, 미니멀하게 움직이며 그 빈 공간에 맞서며 공간과의 연결을 상상하게 한다. 하지만 음악의 장력이 거두어지자 그 움직임에 대한 집중(의 시선)도 사라진다.

김서윤의 중심적 움직임은 ‘7273 컴퍼니(Compagnie 7273)’의 두 안무가 로렁스 야디(Laurence Yadi)와 니꼴라 껑띠옹(Nicolas Cantillon)의 안무법을 적확하게 체현하는 표본과 같다고 생각되는데, 분화되는 명확한 지점을 남기는 힙합 움직임의 일부 잔상이 느껴지는 무용수들의 움직임이나 회전 지점에서 날렵하고 명확한 시선을 유지하며 한국무용의 방식이 느껴지는 임소정의 움직임, 중심축을 유지하며 유연한 안으로의 중심을 유지하는 대신 과잉된 분절로 그것을 표피적으로 전유하려는 유다정의 움직임 등은 ‘퓟퓟(Fuittfuitt)’[두 안무가는 마캄(Maqam)이라는 아랍 음악 체계에서 영감을 얻었는데, 음과 음 사이를 연주할 수 있는 마캄을 몸으로 표현하는 것에 집중하며 고안되었다고 한다]이라는 안무법 자체가 제대로 체현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물론 이는 무용수들의 전공, 기원적 움직임을 특정 하는 것이 아닌, 그 움직임의 변용이 그 자체로 기원적이지 않는 경우에, 그 표피를 임시적인 용어로 특정해 둔 것에 불과하다).

무대 전반의 각기 다른 무용수들의 (예외적인) 안정된, 헉헉거리는 움직임들을 보자면, 퓟퓟은 꽤 체현하기가 어려운 움직임이라는 생각을 거듭 들게 하는데, 기본적으로 매우 유연하면서도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무엇보다 일정하고 적확한 반복을 가능하게 하는 리듬 단위를 고안해내는 것이 필요하다, 개별 무용수의 몸과 고유한 움직임에 적합하게. 결과적으로 반복된 움직임의 구문을 상쇄하는 건 음악일지 모르겠다. 거꾸로 음악은 이 반복된 움직임에 함께 말려 들어가며 특정한 자취를 남기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음악은 움직임보다 더 많이 다양한 분화와 실험을 거듭한다, 자율적이고 자유롭게.

사실 김서윤의 ‘끝없는’ 움직임에 반해 그에 더해지는 움직임들, 특히 후반부 듀엣으로 동일한 움직임들을 마주보고 수행하는 장면은 산만하기 이를 데 없다. 곧 ‘거대한’ 음악이 무대 전체를 채우고 있음에 비추어 보면, 공간적 반향을 고려해 움직임은 특정 지점의 동일적 반복이 아니라, 각기 다른 움직임들의 분배적 배치를 통해 음악의 현란함 내지는 에너지의 방사적 분출이 무대를 채우는 것을 육화해야 했으리라 보인다.

동일자적 반복은 각기 다른 기량들을 가진 무용수의 움직임들의 차이를 분별하게 하며 나아가 몸에 맞고 맞지 않음을 확인시키는데, 이는 김서윤의 움직임이 마치 음악의 그릇이 되는 듯한 인상을 주는 첫 장면과 비교되는 지점이다. 오히려 동일자적 반복은 횡렬로 조직되는 움직임에서 힘을 얻는다. 무대 중앙을 밀고 오는 김서윤을 비롯한 무용수들에 이미 무대에 있던 무용수들이 하나의 물결로 무대를 휩쓸고 가는 장면 혹은 약간 사선으로 무대 정면을 보고 서서 움직이는 장면은 하나의 에너지로 (음악에 온전히 맞서는 또는 음악의 힘을 온전히 체현하는 것으로) 보이게끔 한다.

또한 이러한 장면은 각종 현들이 일정 음계에서 튕겨지고 있을 때 일렬로 정면을 보고 선 무용수들의 마지막 발악적 움직임에서, 음악과 움직임의 동시성 곧 충돌과 간극을 극렬하게 확인하게 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퓟퓟이라는 움직임 방식을 적용하면서 동시에 음악에 적응하려는 것이 동시적으로 수행될 때 개별 무용수들은 마치 권투를 하듯 음악을 신체로 그리면서도 음악으로부터 이탈되는 몸을 붙잡아두기 위해, 음악에 적응하기 위해 발악을 하는 듯 보인다. 한계는 즉시적으로 주어지는 음악에 움직임의 구조를 만들지 못하는 것에서 근본적으로 주어진다. 동시에 음악과 간극을 맺으며 파생되는 마찰적 파편들은, 그리고 음악으로부터 튕겨나가는 움직임들은 그것이 ‘현재’라는 것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슈팅스타>는 음악과 움직임의 합치를 꿈꾸는, 시도하는 작업이다. 이는 황홀경으로 이어지거나 또는 어긋난 질서로 드러난다. 여기서 관객은 언어를 ‘잃어버려야’ 한다. 관객은 음악이란 매체, 움직임이란 매체에 온전히, 완전히 기대야 한다. 김서윤이 보여준, 공연 전체적으로 일관된 움직임, 퓟퓟의 재적용/적응은 꽤 인상적이었다. 음악적 변주이자 폭주적 실험은 엄청난 양이었고, 어떤 움직임들은 그것을 입고 흐트러지지 않았다. 곧 음악은 움직임으로 상쇄되었다[하지만 다시 이 작업을 볼 수 있다면 음악과 움직임의 상응 관계를 인지하면서 작업과 거리를 두고 (음악을 상세하게 들으며) 보고 싶다는 생각이다].

퓟퓟은 ‘음악을 입으며 자라나는 움직임의 반복’으로 보인다. 곧 블랙스트링과의 협업이 근본적으로 작업을 변용시킨 것일 수도 있다, 음악에 따라 움직임은 변화되는 시각을 발생시키는 것일 수 있다. 또한 무용수들의 각기 다른 장르/영역의 개성이 퓟퓟과 절합되며 새로운 움직임을 낳은 것일 수도 있다. 이번 실험은 결과적으로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 것이었을 수도 있지만, 여러 모로 흥미로운 것이었다고 생각되는 부분이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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