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준 2017.11.13 20:40

▲ 임영주 작가 개인전, 《오메가가 시작되고 있네(LOOK, HERE, BEGINS THE OMEGA)》[사진 제공=임영주] (이하 상동)

일관된 형식으로 밀집되지 않았다는 것은 전시를 여러 차례 본 이후에 드는 확고한 인상이다. 마치 푸티지 영상의 컷들을 방사하되 사각으로 전시장을 빙 두른 (것 외에 배치의 방식에 있어 어떤 다른 원칙을 확인하기 어려운) 전시는, 회화에서 영상이 아닌, 영상에서 회화로 시점을 ‘거꾸로’ 옮긴 작가-작가의 기원적 매체는 회화로, 영상 작업을 최근에 주로 선보여 온 작가의 이번 작업에서 영상은 회화를 ‘재매개’했다고 할 수 있다-의 관점적 배치에 의한 것이다(첫 번째 가설: ‘그림은 일종의 하나하나의 스틸 컷이다!’).

사실상 배치보다 중요한 건 작업이 ‘밑’이라는 동일한 제목을 가짐에도 고유성을 가진 채 계열화되지 않는다는 것인데, 여기서 작업이 담은 대다수의 사물(오브제)들은 이름(명명)을 초월한다(‘물생활’이란 두 개의 설치 작업이 예외에 속한다). ‘밑’이라는 개념은 한편으로 작업을 초과하거나 사물의 구체성을 결여한다. 따라서 ‘밑’이라는 명명은 신비하다고밖에 할 수 없을 지경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어떤 의미의 함축을 의미하는 듯하다. 그 ‘밑’이 대부분의 작업에서 일관되게 주장되고 있어 작가가 가진 어떤 ‘본원적 심상’을 가리킨다는 혐의를 완전히 거두기 힘들게 한다는 점에서.

작업들이 일관되지 않다는 건, 제목 앞에 달린 동일한 ‘밑’이라는 단어가 후차적으로 작업들을 포괄적 개념으로 아우르지 않으며 또한 ‘밑’이라는 개념이 작업들을 통해 일정한 개념으로 포획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런 개념의 괴리, 사물의 적확한 명명 불가능성은 작업을 파편들로, 그리고 작업이 담은 사물들의 각기 다른 세계로 이동시킨다. 그림들의 전거는 전시 바깥의 여러 다른 시간대의 세계들에 있고, 그림들은 전시 안에서 하나의 계열체로 종합되지 않는다.

▲ <밑_물렁뼈와 미끈액>(2017)

한편으로 작업들은 각기 다른 사물들을 담은 것과 함께 여러 다른 방식들로써 그려지고 만들어졌다는 공통점을 가진다는 점에서 일관되다. <밑_물렁뼈와 미끈액>(2017)의 연작들과 <밑_오메가 밤 산 물 소리 빔 촛대 물 돌 맑음>(2015~2017)의 일부 작업들은 마치 카메라 심도의 활용과 연관성을 갖는 듯한데, 전자는 원경으로 바라보고 획과 같이 세부가 생략된 채 그려져 있다면, 후자는 근경으로 바라보고 획들이 상대적으로 두텁고 따라서 세부도 더 구체적이다.

반면 <밑>(2017)이나 <밑>(2016)(‘밑’ 아래 구체적 대상 혹은 개념을 지칭하지 않는 유일한 그림들로, 이를 다른 작업들과 다른 본원적 심상이라 생각할 수 있을까)은 캔버스를 더듬거리며 또는 긁어내어 그리며 물감(획)은 적층된다. 불투명한 그림은 두께로 가늠된다. 이는 어떤 형태를 지시하는 대신 그 자체가 하나의 사물임을, 시선의 마찰에 따른 산물임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역순으로 과정을 추정해보면 사물은 너무 가깝고 마치 신체는 그 사물과 연접해 있는 듯하다.

여기서 작가는 사물을 재현하(고 있음을 은폐하고 있)기보다 그것이 곧 사물에 대한 적확한 인식(몸의 반응)이었음을 의심 없이 주장하는 듯하다. 비재현적 그리기, 일종의 사물로의 되기는 ‘적확한’ 결과물을 위한 합목적적이고 논리적인 행위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여기서 그리는 것은 일종의 수행과 같은 행위의 성격을 띠는데, 사물과 나는 그로써 가까워지며 사물과 나 사이의 경계가 지워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수행적 행위에 따른 어렴풋한 형상이 사물을 겨우 드러내고 있는 것에 가깝다.

▲ <물생활_‘눈을 가늘게 뜨고 보거나 한 곳을 보다 보면 그렇게 보입니다’>(2017)

실제 돌들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도록 재현해 놓은 설치인 <물생활_레이아웃 은신처>(2017)와 전시장을 들어서기 전에 윈도우에서 볼 수 있는, 돌들의 부조를 뜬 것 같은 <물생활_‘눈을 가늘게 뜨고 보거나 한 곳을 보다 보면 그렇게 보입니다’>(2017)에서, 전자가 가느다란 줄로 매달아 내려뜨려 물 위에 있다고(‘이것은 물_실재입니다!’) 지시하는 것처럼 후자는 이것이 충분히 시각적 수행-‘노력’으로 치환되거나 ‘신념’에 기반을 둔-에 의해 결과적으로 작업이 실재로서, 아니 (작업이라는 원관념이 없이) 실재가 드러날 것임이 주장된다.

<밑_오메가 밤 산 물 소리 빔 촛대 물 돌 맑음>의 한 작업에는 돌이 캔버스 위에 올려져 있는데, 이는 작업이 작업의 모태가 된 사물이 있는 세계의 부속이었음을 실제로 주장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하나의 명징한 증거이다(‘돌’은 재료가 아닌 제목에 포함돼 있어 작업의 세계로 동화된다, 아니 작업에 더해진 외재적 산물로서 작업을 초과하며 나아가 초과되는 작업이 실재화되는 어떤 지점에서 공명한다). 작가의 작업들은 하나의 관점으로부터 출현한 인공물들이지만, 어떻게 보면 시공간을 달리 하는 파편들로 각각의 세계를 가리킨다.

▲ <밑_오메가 밤 산 물 소리 빔 촛대 물 돌 맑음>(2015~2017)

시공간의 파편들, 스틸 컷으로서의 그림은 시간 차 속에서 연속된다(여기서 스틸 컷은 영상으로 종합되기보다 영상에서 풀려나온 것들이다). 그렇다면 그 시간은 개별 작업에 대한 자족적이고 충만한 시간과 온전한 작업의 완성을 허락하기에는 어느 정도 일정한 간격으로 다음에 올 간극을 떠안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다닥다닥 붙은 배치나 일정한 스타일로 귀결되지 않는 작업들의 양상, 나아가 재현보다 ‘밑’이라는 원관념에 다가가는 수행적 행위에 따른 작업들, 재현의 간극을 지우는 무한한 현재들은 일관된 시간으로 전시장을 관통하는 관람으로부터 유격되게끔 한다.

p.s. [두 번째 가설: ‘작은 스틸 컷(가령 <밑_오메가 밤 산 물 소리 빔 촛대 물 돌 맑음>, 반면 <밑>(2017)과 <밑>(2016))은 예외이다)들은 압축된 그림이다. 확대를 통해 세부는 더 구체적이 된다. 하지만 축소를 통해 세부들은 일종의 시계열적 횡단을 가능하게 한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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