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준 2017.11.13 19:28

인트로: 세 가지 방식들

배우들과 공연 스태프의 DMZ 일대(파주, 연천, 철원부터 고성까지)를 걷는 여정은 무대로 반영된다. DMZ를 상징적으로 표상하는 사물들, 철모와 소총, ‘삐라’ 등의 미니어처가 무대 중앙의 모래 바닥에 깔린 채 무대는 카메라에 의해 매개된다. 동시에 이들이 겪은 현장은 무대로부터 관객석을 둘러싼 나무 패널로 짜인 구조물 위의 걸음으로 보완된다. 배우들의 경험은 말하기와 걷기의 두 가지 방식으로 되살아난다.
 
카메라의 시간

▲ ‘두산아트센터 창작자육성 프로그램’ <워킹 홀리데이>(이경성 연출), (사진 좌측부터) 배우 장성익, 나경민, 김신록, 성수연 ⓒ정찬민

‘내 속도대로 걸을 수 있다’는 성수연 배우의 말은, 걷기가 오롯한 물리적인 몸의 쓰임을 지시하기보다 자율적인 질서를 가진 몸의 생성을 의미하고 있음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걷기는 ‘시선을 위한 시간’(“보기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_전강희 드라마투르그)을 가질 수 있었던 이들의 여정 속에서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시선은 카메라를 통해 어느 정도 재현이 가능해진다.

연천에서 강을 건너가는 우범진 배우의 허리춤이 물에 잠기자 모두는 만류하는데, ‘실재’(영상)는 긴장감 있게 그 시간을 재현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 장면은 무대 위의 사람들의 얼어 있는 포즈와 시선(‘경험’)으로 보증된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영상이 없으면 불가능한데, 곧 실재가 이미 벌어졌고 그 경험이 모두에게 공유된 채 남아있다는 가정 아래 가능해진다. 영상은 실재의 광경을 계속 무대 위에 실어 날라다 주고, 관객(과 배우)에게 경험을 (재)환기시킨다.

카메라는 한편으로 경험이 아닌 실시간을 매개한다. 과거(역사)는 무대(현재)를 매개하는 카메라의 확장된 시각을 통해 발굴되며 살아난다. 카메라를 비추는 나경민의 수행적 재현은 실재를 온전히 재현하는 대신, 공간의 점프(클로즈업된 사물이 시간의 지연과 함께 인계되는 스크린)로써 시간의 간극(역사와 현재)을 상쇄한다. 기술(技術)적 매개는 새로운 기술(記述)의 형태를 성립시킨다. ‘더듬어가는 촉각적 시선으로서 말하기’. [하지만 온전한 재현이란 없다. 동시에 재현하지 못할 것 역시 없다. 따라서 모든 실패하는 재현은 온전할 수 있다.]

말하기의 사유

▲ <워킹 홀리데이>, 배우 나경민 ⓒ정찬민

배우들은 개별적인 자신으로 극 안에서 자리한다. 배우들은 가상의 캐릭터에 자신을 대입하는 대신, 자기 질문을 찾아가는 과정을 겪고 그 과정에서 체화된 말들을 관객에게 전한다. 전쟁의 역사를 묵중한 무게로 떠안으며 숭고하게 다루지 않는 대신, 아직도 진행 중인 역사를 발견한다. 역사는 가령 즉물적으로 터지지 않은 지뢰(“지뢰 유실 지역”), 불완전하게 가시화된 북한 군인의 죽음(‘무명인’), 전쟁의 시뮬레이션(여기저기서 들려오던 사격훈련의 소리) 등으로 새롭게, 아니 새로운 것들로 발견된다.

발이 닿아 도착한 기점들은 커다란 여정의 계획 아래 우연한 것들로 발생한다. 개별적인 관점은 걸음(사유의 ‘시간’)과 걸음(‘장소’에의 발견)으로 누적된다(그리고 이는 극 안에서 다 드러나지 않는, 이들의 수많은 내부 워크숍을 포함한 교류와 대화를 통해 형성되고, 최종적으로 대사로 재적용된다). 직접적으로 이산가족으로서 분단의 고통을 안고 있는 전쟁의 세대를 아우르며 거대 서사를 재현적으로 인계해 내지 않더라도, 역사는 고유의 관점들로 내파되고 갱신된다. 개별적인 고유의 진리는 역사를 현재의 시선으로 탐문한다.

작품에서 드러나지 않는 바가 있다면, 이는 프로그램북에서의 언어다. 현예솔 조연출의 ‘도보 리서치’와 ‘제작 노트’, 전강희 드라마투르거의 글은 (순서대로) 이 작업(의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또한 배우들의 말 중에 (유일하게) 성수연과 신선우의 말은 삶을 작업으로 투여하는 가운데 작업으로까지 이끌어냈음을 잘 드러낸다. 이 작업이 임시적으로 스스로가 (작업과 결부 지어) 자신에 대해 그리고 다시 작업으로 자신의 생각을 이끌어내는 데 시간과 사유를 쏟는 것이었다고 본다면, 배우들의 말은 대사와 마찬가지의 위상에서 단순히 미사여구나 감정적인 소회 정도에 그칠 수는 없는 것이다(물론 이는 대부분의 프로그램북이 가진 미약한 실은 오해되는 위상에서 기인하는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걷기의 거리

▲ <워킹 홀리데이>, (사진 좌측부터) 배우 신선우, 우범진 ⓒ정찬민

걷는 것은 단지 몸의 쓰임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는 자기의 몸(숨)을, 타자의 몸을 관찰하는 동시에 사유의 대상으로 두는 것이기도 하다. 공연은 거기서 나아가 ‘걷는 것’ 자체에 대한 사유를 더하는 동시에 걸으며 말하기를 무대에 도입한다. 곧 심장의 뜀박질이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그 말은 몸을 체현하고 있다. 숨이라는 생동감이 무대로 전달된다. 끊임없이 현장이 아닌 무대를 걸으며 무대에서의 걷기의 리듬이 안정화된다. 그리고 무대는 현장으로 재활성화된다.

배우들은 어떤 시간에 말없이 계속 무대를 싸며 걷기만 한다. 말 없는 여정에 스스로를 놓아두었듯 관객을 그 시간에 놓아둔다. 이들이 맞닥뜨리게 되는 건 끝이 없는 자연이었지만, 관객은 나무 패널을 울리는 증폭된 노이즈 아래 그들을 끊임없이 흘려보낸다. 배우들은 그 가운데 터벅터벅 쳐지기도 하고, 누적되는 피로와 시간으로 녹아내린다. 중단된 무대, 아니 확장된 무대는 처음에 배우의 걸음을, 배우의 등장과 퇴장을 가시화하다 어느 순간 짝 지은 배우들의 모습을 통해 배우들 사이, 걸음의 간극들을 드러낸다.

앞사람의 속도에 맞춰 멈칫 하고 그를 관찰하게 되는 광경, 김신록의 잠깐 스쳐가는 희미한 미소로 드러나는 장면은(이 부분은 의식적/지적인 측면에서 계산/수행된 작업이 전달하는 어떤 개념적 측면의 이면, 무의식적인 측면에서 드러나는 가장 인상적인 부분일 것이다), 함께 걷는 것에 ‘합의’한 이들의 연대를 확인시킨다. 어느 순간 걸음을 공유하는 타자와의 거리는 자기의 속도와 숨을 타자로부터 인계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니 그것을 자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거리는 통일전망대의 망원경으로 바라본 38선 바깥으로 전혀 다를 것 없어 오히려 놀라운 이북 풍경과의 거리, 대상을 표적으로 만드는 사격의 기계화된 거리와 차이를 갖는다.

소진의 늪

▲ <워킹 홀리데이>, (사진 좌측부터) 배우 신선우, 김신록, 성수연, 장성익, 우범진 ⓒ정찬민

이 작업의 위대한 점은, 배우들 각자의 사유를 스스로에게 다시 관객에게 반향시킨다는 것이다(여기서 배우들의 위계는, 그리고 궁극적으로 연출과 배우의 위계 역시 지워지는 듯 보인다. 그러나 사실 이 작업은 ‘크리에이티브 바키’라는 유동적인 창작 공동체의 작업으로 불리어져야 하는 것 아닐까). 그리고 여기에는 모두가 공통의 걷기의 경험을 가진다는 전제가 있다. 두 시간에 육박하는 말하기와 걷기의 기술은 사실상 “쉬는시간”과 함께 어느 정도 소강상태를 맞는다. 소진되는 육체처럼 생각에도 진이 빠지는 듯하다(이러한 피로 상태는 사실 관객의 몸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가?).

이는 결국 개별적 말하기의 방식이 무한한 질문으로 드러나는 가운데, 그 질문들의 짜임을 비가시적인 차원에서 경제의 논리에 의해 조율과 편집을 통해 구조화시켜야 함을 의미한다(사실 그렇게 작동하고 있다!). 동시에 발걸음의 사운드 외에 텅 비어 있는 무대는 미세한 지각들의 감각으로 상응될 만한 요소가 부재한다. 결과적으로 연극은 기승전결의 흐름을 갖는 마스터베이션의 짜임이 아니라, 리듬과 사유를 ‘함께’ 동시에 ‘간극을 통해’ 조합하는 기술의 짜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지루함과 피로도 역시 이들이 실제 걷기에 상응해 수행되었던 부분, 또한 실제 쉼을 통해 상쇄되고 가시화되었던 부분이라는 점에서 ‘리얼 타임’을 체현하고자 하는 작업과 궤를 같이 하는 듯 보인다. 여기서 생산적이지 않은 것은 없다. 또한 경험은 사유의 한 부분을 차지할 뿐더러 사유의 근거가 되고 사유를 다시 생산한다. 말하기와 걷기는 계속해서 ‘누적되고’ 어떤 지층을 이룬다(다시 묻자면, 이러한 피로 상태는 사실 관객의 몸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가?).

폭력(전쟁)을 어떻게 사유하는 게 가능한가

▲ <워킹 홀리데이>, (사진 좌측부터) 배우 김신록, 나경민, 성수연, 신선우, 장성익, 우범진 ⓒ정찬민

궁극적으로 표적(조작 가능한 대상)과 존재(타자의 현존)의 사이, 거리는 사실상 가장 강조되는 부분이다. 객석의 머리 위를 무대 뒤쪽으로부터 무대의 표적 위로 관통하는 bb탄 총알들은, 전쟁을 끊임없이 재현하는 합법적 폭력을 비가시적으로 그러나 청각과 촉각으로 감각하도록 가시화한다. 그 텅 빈 표적(실제로는 북한군의 모습을 재현하여 사용됨을 극 안에서 주지시킨다)에 성수연이 위치하며 표적과 존재의 불일치를 합치시킨다.

‘안전한 폭력’으로 위장된 사격은, 기실 ‘오인된 폭력’으로, 공포와 위험을 감정이 아닌 지각적으로 발생시킨다. 우리의 뒤통수를 뚫고 어느새 앞에서 튕겨져 나와 뒹굴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우리의 시각으로는 실은 인지되지 않고 후차적으로 인식되는 것으로(마치 오로지 피아의 영토적 식별이 경계, 곧 38선으로써만 인식되듯), 우리를 실제로 관통하지 않은 그러나 결국 표적 역시 뚫지 않은 그 총알에 우리는 죽어 나간 어쩌면 죽어 나갈 시체를 대입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이것은 극 안에서 가장 섬뜩한 장치를 통한 명징한 사유 조각을 쏘는 장면이다(전쟁의 동시대적 재현이다!).

전쟁은 한편으로 전쟁을 재현하려는 노력으로 치환된다. 머리를 맞대고 미니어처 병정들을 모래로 덮고 그 앞에서 성수연 배우가 실제 물고 피우는 담배 연기, 그리고 조명과 사운드가 합산되며 효과를 발생시킨다. 매체들과 몸들의 뒤섞임과 그 모든 걸 배제하며 그 속의 전쟁을 확장해 드러내는 화면, 그러나 그 바깥의 것들을 모두 담아내지 못하는 화면과 실제의 간극이 혼란스러운 가운데 이는 마치 전쟁 그 자체로 혼동되며 전쟁을 가시화한다. 이는 앞서 카메라가 과거의 재현 대신 현재를 수행적으로 대리하며 과거를 현재(의 사유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 방식과 유사하다.

결국 몇몇 극 속의 재현의 장치들은 역사를 (완전한 재현을 포기하고 대체하며) 불완전하게 재현함으로써 과거(역사)를 현상한다. 그것은 카메라로, 우리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들로 변한다. ‘우리는 어떻게 적과 타자를 구분하는가.’ 이들의 물음은 앞서 38선이라는 상징계적 실재에 의해 가시화됐다. 총의 사정권에 들어온 존재를 안전하게 대상의 윤곽으로 바꾼 표적은, 죽이느냐 사느냐의 선택지 안에서 육박해 오는 긴장과 흥분을 순식간에 해소하는 작용의 일부로 자리한다. 거기에는 김신록의 머뭇거림과 같은 것이 자리해서는 안 된다.

작품은 마지막 장면의 뒤로 돌면서 보는 각 배우들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북한 주민을 앞서 강을 건너 손을 흔들던 우범진 배우의 모습으로 전치된다. 이때 사운드는 뭉개지고 몽환적으로 되면서, 아득한 타자의 거리를 상정한다(‘그들은 북한 사람이다!’). 그러나 다시 장면이 바뀌고 발 들고 총을 쏘는 움직임을 연출하고, 총소리와 함께 (극 속에서 언급됐던 발목에 총을 실제 맞는 많은 사례들에 입각해 그것을 방지하기 위한 차원의 다리를 내린 채 쏘는) ‘엎드려 쏴’ 자세를 다리 한 쪽을 든 잘못된 자세로 보여주며 표적으로 바뀐 존재의 일부, 아킬레스건을 조명한다. 곧 존재와 대상의 거리는 명확한 경계를 갖기보다 절대적으로 규정되기보다 상황(나아가 시대)에 따른 산물임을 인식함으로써 전쟁을 체현한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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