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준 2017.10.31 00:28

아시아 & 아프리카 & 중남미 댄스 익스체인지 2017

예술에서 소위 국적이 다른 작가/작업자들의 협업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아니 그것은 어떤 식으로 의미화되는가, 가령 과정(자체의 절대성)을 이야기하는가, 아니면 (필연적인 실패의) 결과를 이야기하는가. 보통 하나의 안무를 모두가 소화하는 방식은 애초에 합치를 의도했다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그로부터 드러나는 ‘차이’가 합치라는 순진한 의도를 비꼬며 그로부터 미끄러지는 찬란한 실패를 보란 듯이 보여주는 것일까. 이러한 결과는 단순한 섞임이라는 측면에서 퓨전(의 새로움)으로서 불릴 수 있는가.

시댄스 2017에서 선보인 아시아 & 아프리카 & 중남미 댄스 익스체인지 2017[총 5개 나라의 무용인들이 참여했다. 리카르도 부스타만테 마르티네스(Ricardo Bustamante Martinez, 콜롬비아), 누르 세크레닝시 마르산(Nur Sekreningsih Marsan, 인도네시아), 칼라니 사치트라 위제반다라(Kalani Sachithra Wijebandara, 스리랑카), 빅터 페트로(Victor Peturo, 짐바브웨), 허윤경(Yunkyung Hur) 이상 5명]의 시작은 앉은자리에서 네 명이 마주본 채 한 손씩을 맞대고 한 명이 다른 이들에게 손을 두드리는 장면이었다. 곧 나의 손이 너의 손과 뒤바뀌는 체험, 또는 맞바꾸는 체험을 선사하는 것인데(가령 우리 신체를 분절시켜 타자의 신체로 바꾸는 것은 자위행위에서도 가능한 일이다), 이는 일방적인 타 문화의 체험의 수여가 폭력이자 선물일 수 있음을, 타자의 체현이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전이되어 자신에게 발현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이는 이 다국적 협업의 사례에서 하나의 커다란 전제를 가시화하며 전제로 내세운 것이다.

이어 이들은 다른 안무가의 평소 몸들을 재현한다. 그럼으로써 가까워지는 것은 오히려 우리 스스로였다고 말한다. 이는 타인의 동작이 자신에게 옮겨졌을 때를 스스로 관찰/의식하는 차원에서 가능하다. 거울뉴런의 법칙에 의한다면, 타인의 동작을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보는 것만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동작인 것임을, 그리고 그것이 온전히 기억 안에서 재현으로 옮겨지기 힘든 과정을 겪는 과정에서는 자신(의 몸)을 인식/의식할 수밖에 없다.

사실상 재현은 똑같은 것이 될 수 없다(다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 점에서 이들의 행위는 실패하는 모방인 동시에 근본적 의미에서 재현의 불가능성을 확인시킨다. 동시에 이들은 모두 말하는 자, 적확하게는 증언하는 자, 목소리를 가진 자이자 고유의 언어를 가진 자로서 선다(이는 앞서 다른 이들의 움직임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드러나지만, 모두가 드러났던 것은 아닌 것으로 기억한다. 어쩌면 들렸던 것이 같은 국적인 허윤경 안무가의 언어였을 수도 있다). 사실상 이는 어쩌면 이런 류의 프로젝트에서 반복되는 스테레오타입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되는 바 있다.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은 움직임보다 언어가 더 빠르다. 움직임이 초지역적인 공통의 근거를 가지고 있어서? 아니 언어는 움직임보다 더 적확하고 확연하게 다르게 곧 인식되기 때문이다.

곧 이러한 고유성은 차이를 안은 임시적 공동체에 있어 주장되고 지시되어야 하는 것들이다. 그럼 연대란 작위적 요소일까. 연대라는 것이 공통의 안무를 구성함으로써 성립할 수 있는 것일까. 차이는 어떻게 이 불안정한(?) 공동체 내에서 끌어안아지며 동시에 고유성 자체가 될 수 있는 것일까. 하나의 공통된 몸의 형성의 출발과 서로가 서로를 체득하기라는 연습 과정을 통해서 구성한 공동체는, 다시 한 사람의 몸들로 돌아가며 그 차이를 온전한 것으로 주장한다. 하지만 더욱 주장되어야 하는 것은 그 차이가 민족과 국가, 동서양의 것으로 귀결되기보다 그러한 신화들의 해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러한 작업은 실패를 의도적으로 선택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모두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다른 것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너무 다르다.’ 결과적으로 무엇이 말해져야 하고 무엇이 표현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서로에 대해 어떤 것도 말(표현)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든 말(표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궁극적으로 말(표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마지막 문장이 결국 이 공연에서 제시되었던가. 뭔가 작업은 하나의 공통된 짜임을 구성하는 것으로 퇴보하는데, 이들이 연습실에서 공통된 것으로 발견했을 법한 결국 공통적으로 따르는 세계표준시에 의거한 하나의 시계였던 것일까. 이들은 합심해서 시계추 모양을 만드는 일련의 움직임을 통해 어떤 극적 몰입으로 치닫는다. 그리고 그 끝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도 암흑이었던가. 곧 밝음이 아니라 무대의 관성적인 성공의 공식으로서 어떤 문법.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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