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준 2017.10.31 00:09

마오 무용단(Company Mariantònia Oliver) <아주 많은(Las Muchas)>, 보결댄스라이프 <물의 달>

마오 무용단, <아주 많은>ⓒTristan Perez-Martin [사진 제공=국제무용협회](이하 상동)

커뮤니티 댄스는 어떻게 성립하는가. 가령 어떤 동작을 그대로 전달하고 모방한다는 것, 또는 그들의 동작으로부터 춤을 생성하는 것, 커뮤니티 댄스에서의 안무의 두 가지 방식은 춤의 출발선상에서부터 본질적으로 분유된다고 할 수 있는가. 마오 무용단에서 안무가 마리안토니아 올리베르(Mariantònia Oliver)의 춤은 그야말로 자연스러웠는데, 무대를 자유롭게 뛰노는 반면 커다란 보폭으로 흔들림 없이 공간을 온전하게 채우는 데 어떤 흠결 없이 춤을 췄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카메라는 (결코 전문적인 무용수로서 훈련되지는 않은) 가령 구두를 신은 발과 같은 할머니들(원래 작품은, 2012년 스페인 마요르카 섬에서 65세 이상의 할머니들과 함께 초연됐고, 시댄스에서는 70세 이상 국내 할머니 8인이 무대에 함께 올랐다)의 부분적인 신체로부터 나오는 작은 움직임들을 클로즈업에서 잡는 것(또는 정적인 여러 포즈들)에서부터 시작해, 그들이 수줍게 주어진 지침으로서의 움직임들을 받아들이고 체화하는지에 근접해 간다.

어떤 움직임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자신의 본래적 움직임과는 거리가 있는 것일까. 주어진 움직임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움직임은 자연스럽지 않은 것일까. 아니 이로써 우리는 움직이게 되는 법을 다시 배우게 되는 것일까. 가령 커뮤니티 댄스의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을 안은미 컴퍼니의 ‘할머니’(〈조상님께 바치는 땐스〉), ‘학생’(〈사심없는 땐스〉), ‘아저씨’(〈아저씨를 위한 무책임한 땐스〉) 이렇게 3부작으로 대표되는 작업들, 특히 그 대상의 측면에서 유사성을 갖는 ‘할머니’들의 춤은 그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전제/주장하고 있다.

‘원래 그들은 춤을 출 수 있는 존재이고, 춤이 그 몸속에 꿈틀대고 있는 존재들이다.’ 이는 현지를 돌아다니며 그들의 춤을 ‘수집’(결과적으로 ‘박물관 아카이브’를 만드는 것까지를 안은미 안무가는 생각/주장한 바 있다)해 보여주는 영상들에서 은폐된 부분들을 통해 가능한데, 이는 영상 속에 소리가 없다는 것, 곧 소리를 철저히 지웠다는 것, 그리고 앞에서 무용수들이 같이 춤을 추면서 그들의 춤을 유도했다는 것, 또는 본보기를 보였다는 것이다. 이는 완전히 편집되지 않은 조각들에서 드러나는데, 소리와 앞의 무용수가 드러나는 조각이 그것이다.

춤을 추기 위해 어떤 시청각적인 단서가 필요하다는 것! 그러나 이는 춤이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시하는가. 오히려 이는 춤이 비훈련되는 일반인들이 마치 훈련된 무용수처럼 자연스럽게 바로 춤을 출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곧 무대의 전제/장면을 그대로 일반인에게 부여한 결과는 아닌가. 곧 춤을 이끌어낸다는 것! 이는 춤과 일상이 본래적인 간극을 맺고 있음을 이야기하는 직접적인 결론으로 이어진다기보다는, 춤이라는 자연스런 행위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춤을 출 수 있는 환경, 동시에 그것이 제반 조건이 되어서 이뤄지는 춤에 대한 충동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마오 무용단, <아주 많은>

갑작스레 음악이 있고 춤을 춰도 된다는 것이 춤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춤은 한편으로는 내적 충동이 움직임으로까지 이어져야 하는 개인적/내재적 행위이고, 다른 한편으로 모두가 춤을 춰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가 갖춰져야 한다는 점에서 집단적 행위이다. 이 두 가지 전제를 가시화하지 않은 게 결국 안은미 안무가가 보여주는 커뮤니티 댄스의 방식이었고, 이 ‘자연스러움’의 강조를 통해 부끄럼 없는 춤을 추던 할머니들을 보는 관객들은 그들을 대상화하지 않는다는 착각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춤을 추지 않는 곳에서, 홀로 춘다는 것은 정말 자연스러운 것이라 할 수 있을까. 따라서 마오 무용단의 작업에서 할머니들이 처음 부끄럽게(=자연스럽지 않게) 출발하는 모습은 오히려 자연스러웠다고 할 수 있다. 그 익숙하지 않은 모습, 그러나 결국 모두 다를 수밖에 없는 모습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며, 동시에 그들 각자의 적응 방식을, 또 다르게 변용되는 모습들에서 그들의 생래적 몸의 방식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리안토니아는 훈련된 몸의 단단함과 정교함 대신, 어떤 동작을 새롭게 구성하는 방식으로서의 춤을 보여준다.

춤을 춘다는 것, 익숙한 음악에 맞춰 어떤 동작을 활기 있게 구사하는 것. 곧 우리가 아는 어떤 대중적인 혹은 일반적인 춤의 한 전형으로서의 춤. 그리고 영상의 할머니들을 이은(그들의 동작을 고스란히 대입한) 실제 우리나라 할머니들의 춤은 후반에 작은 소품쯤으로 제시된다. 이는 오히려 이들을 함부로, 무리해서 주인공으로 올리지 않은 차원에서 신선하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왜냐하면 안무가가 체류하며 실제로 그들과 ‘자연스런’ 움직임을 가져갈 수 있기 위해서는 실제적으로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했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동작은 결코 완전한 것이 아니지만 온전한 것인데, 그들은 어떤 동작을 그들 방식대로밖에는 채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의 잉여적 한 부분이 아니라 온전한 모든 부분(을 보여주는 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춤은 무엇일까. 춤은 어떻게 정의될 수 있는 것일까.

보결댄스라이프, <물의 꿈>(31회 서울무용제[2010])ⓒ한용훈

보결댄스라이프는 일정한 춤의 조각들을 전달하는 대신, 춤의 전면을 비전문 무용인(일반인)과 백지 상태에서 시작하며 발현/구체화하는 것으로 작업을 완성해 나간다. 여기서 빨래를 하는 구체적 장면들이 주요한 작업의 모티프가 되는데, 나란히 강가에서 빨래를 하던 아낙네(?)들 중 한 명이 빨랫감을 옆 사람에게 미뤄두면서 겪는 사소한 갈등과 같은 일화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이야기는 길고 또 반복된다.

그 구체적인 것들은 이들이 ‘내가 무대에서 춤을 춘다는 것을 하나씩 처리’하는 제의적 제스처와도 같은데, 그런 점에서 엄숙하고 또는 그들 각자의 자의식들이 반영된다고 할 수 있다. 곧 동작은 완벽하다는 하나의 판타지를 완전하게 보여주는 것과는 거리가 있고, 결국 어떤 동작들을 꾸물꾸물 해낸다는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의 동작은 A부터 Z까지 모두를 함께 만든다는 암묵적 전제를 가정하지만, 역시 주어진 것들을 고스란히 처리(해야)한다는 것에서는 동일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서툰 과정들을 반복하고 주장하는 것이 이 작업의 거의 모든 것이며,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연대(이는 내용적으로 빨래터의 아낙네들이라는 작위적 콘셉트에서 구체화되며 실제적으로도 과정을 함께 공유하고 동시에 무대라는 ‘허허벌판’에서 선다는 것이 작동시키고 있는 부분이다)는 결국 ‘그’ 커뮤니티의 모든 것이다. 곧 우리는 관객이 아니라 철저한 외부적 침입자, 관람객이며 오로지 주인공은 그들밖에는 없다. 그들의 외부는 사실상 없고, 관객은 일종의 기능적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의 동작이 좋다거나 완벽하지 않다거나를 말할 수 없는 입장이다. 그 모든 과정은 그들의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용인해야 한다. 여기에 깔린 전제는 ‘이들은(우리는) 커뮤니티이다!’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결댄스라이프와 마오 무용단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마리안토니아가 정면을 향해 춤을 췄다는 것이다. ‘부끄러움’을 가지지 않은 한 명의 매개자가 있다는 것, 그리고 정면성을 애초에 가정하지 않고 어떤 세계를 끊임없이 재현하는 것(이 속에서 무용수와 일반인은 어떤 차이도 없다)의 차이이다. 후자에서는 어떤 설명도 없이 세계의 환상을 구현하는 자족적 커뮤니티의 단면을 드러낸다. 그것은 매개를 거치지 않고 있지만, 실은 안무가/무용수의 한없는 낮아짐의 자세(‘이렇게 쉬운 움직임을 힘들게 마치 처음인 것처럼 다시 한다!’), 커뮤니티로부터 커뮤티니로 나아가는 일련의 과정에 대한 주장이 자리한다.

‘나는 춤을 추고 있어요! 그것이 당신들을 위한 것이 될 수 있을까요?’라며 끊임없이 의심하며 춤추는 이, 만약 이러한 장면이 없었다면 이후의 장면들은 어떤 식으로 의미를 얻을 수 있는가. 아니 이러한 장면들은 이후의 장면들을 어떻게 다시 조각하는가. 곧 커뮤니티 댄스에서 비어진(비어져야 하는) 하나의 질문, ‘안무가의 자의식’은 어디서, 어떻게 시작하는가의 물음이 그것이다.

왜 춤은 커뮤니티로서 다시 추어져야 하는가, 이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의 물음. 이러한 질문을 급진적으로 ‘나는 여러분 앞에 춤을 추고 있답니다!’로 변환한 것이 가령 그러한 동작이다. 이는 ‘우리 모두는 춤을 춘답니다. 그 춤을 여러분을 위해, 여러분 앞에 펼쳐 놓습니다.’로 이어진다. 보결댄스라이프는 곧 완전한 하나의 가상적 세계(극적 세계)를 구현하는 자신들만의 세계를 보여주는 데 모든 것을 불사른다. 그 결과로서 결국 그들 각자가 갖는 감동은 우리 각자에게 온전히 주어지는가.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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