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2016 프린지페스티벌 5작품 리뷰
    REVIEW/Theater 2016. 12. 5. 11:41

    이지현, <베이비 돌 스파>

     

     

    ▲ [사진 제공=2016 프린지페스티벌](이하 상동)

    '요정'(이라고 소개하는 아티스트 이지현)을 따라 가상의 공간('이곳은 일본 해안가')을 상정하고, 신문지로 사람을 빚고 또 욕조에 담가 신문지를 찢어 만든 물에 씻기고, 신문지를 찢어 손으로 뭉쳐 거품을 뿌려준다. 신문지는 생명과 물질의 매체가 된다. 예약을 통해 일 대 일로 진행되는 퍼포먼스는, 역할놀이를 한다는 점에서는 어린 시절 소꿉놀이와 비슷하지만 레디메이드 사용을 가급적 줄이고, 인형('자신이 돌연 생각한 사람')을 실제 제작하고 그에 생명을 불어넣는 극을 가정한다는 점에서는, 접촉을 통한 몰입으로써 일종의 원시적인 형태의 염원의 주술적 미디어를 구현하는 바 있다.


    지성은, <신부수업>


     

    관객은 일시를 선택해 스테레오타입화된 이상적 신부를 위한 훈육이 뷰티, 웨딩, 집안일이라는 3번의 다른 수업을 치루게 된다. 끊임없이 미소를 짓는 기본 자세(로)의 회귀 혹은 시작은, 윽박지르는 대신 타이르고 부추기면서 변함없는 톤을 유지하는 강사의 기계 되기에 추동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것과 궤를 같이 한다. 곧 발생과 추동이 소진을 앞지르고, 기이한 생명력으로 미션을 독파하게 되는데, 마치 상징적 행위들을 과장된 몸짓의 정제된 안무로 치환한 하나의 에어로빅과 같은 움직임들은 즐거움을 주고 어떤 생각들 자체를 없애므로, 훈육은 비가시적이 되며 그 움직임의 체현 자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영선, <소초리에 달 뜬 밤>

     

    원래 검표소로 쓰이는 어두운 독방에 공영선 안무가와 관객은 독대하며, 가만히 있는 상태에서 손을 잡고 손을 추어올리고 허공에서 다시 움직임을 잇는 등, 움직임의 결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게 된다. 안무를 보는 게 아닌, 그것이 관객의 몸에서 구성되는 것을 감각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마지막에 손에 쥐어준 종이는 브레히트의 시 한 편이었다. 문학은 공연의 끝에서 펼쳐지므로 별개이며 별도로 주어진다. 곧 언어가 아닌 감각과 관계가 있었고, 언어는 그것의 부산물이 아닌 또 다른 언어, 장르 자체로 다가온다. 반면 움직임을 추동하던 보이지 않는 이만이 있었다는 점에서, 스스로 말하는 이로 만드는 시와의 동일성을 갖는데, 곧 감각(의 언어)들을 쥐어주고 관객을 체험 이후의 저자로 만드는 방식이다. 스스로 말하는 방식. 그렇다면 나는 공영선에게 다른 감각으로 안무를 헝클어뜨리거나 변화시키는 퍼포머로  자리하는 것은 가능한 것이었을까. 


    박성현, <누벨라니말>

     

    세 가지 안무로 구성되어 있는데, 관객이 앉아 있는 계단에서부터 시작된다. 관객과 뒤섞인 채 관객으로부터 비껴나며 퍼포머의 지위를 얻는다. 이는 어느새 퍼포머의 지위를 포기하며 관객을 보고 웃으며 제자리에 앉는 것으로 그 흐름이 음악과 함께 깨어진다. 관객에게 새로움은 그에게도 새로움이라는 반증인데, 즉흥적 안무는 시작되고 그치며 실험되고 변화한다. 기둥을 옆에 두고 벌어진 두 번째 안무에서도 비슷한 측면은, 계단에서 수직과 평탄한 바닥이란 계단의 위상을 위에서 들고 접힌 다리의 수직 각도와 같이 기둥과 맞물리는 몸, 곧 공간에 따라 반응하고 달라지는 몸이 만드는 움직임이다. 미래의 나로서 나에게 보내는 전시 공간이 세 번째, 그리고 관객에 의해 현재로 기능하는 안무가가 없는 안무로 구현되는데, '새로운 인간'이란 추상적인 그러나 엄밀한 컨텍스트의 가상이 어떻게 실제적인 위상으로 구현되는지는 의문일 수밖에 없다. 


    매머드 머메이드, <변신하지 않음>

     

    일인 프로덕션, 김은한은 연기를 양식화하여 보여준다. 그것은 자신의 생래적 몸짓과 발성에서 연장된 것이지만, 이는 '연기하고 있음'을 자기 지시적인 언급에서, 한편으로 그것을 하나의 고체적 사실인 것처럼 유지함으로써 보여준다. 전자의 측면에서 이는 자신의 이야기와 이어서 '변신'이란 고전을 자신의 방식으로 독파하는 해설적 소개이며 아무것도 없음의 무대를 가시화하며 그 자체로 충족시키는 방식이다. 가령 액자를 걸려고 했으나 자신의 동생이 깨뜨려 없다는 당황스러운 상황을 극 서사와 자연스레 인접시키며 아무것도 없음의 이전 상태로 공간의 상상적 층위를 넓혀간다. 전 작인 <왕은 죽어가다>의 재현적 서사를 축소하지만 역할이 되기가 아닌 스스로를 역할로 만드는-자기 소구적- 방식의 측면에서, 희비극적이다-스스로를 연기하지만 그것을 다시 역할로 둚으로써.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