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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경, <평화 가라오케> 구성되며 현동화되는 공연REVIEW/Interdisciplinary Art 2015. 7. 27. 16:40
ⓒRanda Mirza
<평화 가라오케>는 즉흥 신체 연기를 하는 배우의 존재를 관객에게 체현한다. 관객은 스크린을 보며 동작을 묘사하는 섭외된 배우가 인이어 이어폰에 의한 청취를 모방하는 것까지를 본다. 배우로서는 귀에 들리는 스크린의 소리와 앞 스크린의 반전된 영상을 바라보며, 언어와 행위의 차원에서 그 둘을 합치시켜야 한다. 언어와 행위라는 ‘이중의 따라 하기’는 시차를 생산하는데, 그것은 현재 즉각적으로 벌어지는 것임을 확증하는 중요한 요소다. 모방/재현으로서 연기는 거울 뉴런적, 인지적 반응에 의한 것이고 관객을 그것을 간격으로 감각적으로 인지하게 된다. 곧 ‘연극은 상연되고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연극은 지연된, 아니 즉각적 반응으로서 신체를 우리가 매우 즉각적인 시차로 그것과 합치시키려는 노력(?)에 의해 현동화된다고 할 수 있다. 그 내용은 여기서 부차적인데, 실은 그 내용은 사회 풍자/비판 등으로, 나아가 급작스런 세계 평화의 자유로움에의 어떤 저항으로 옮겨가기도 한다. 비판적 언어의 움직임적 전유는, 우리를 표피적이고 실제적인 주체의 자리로 위치 지우는 대신, 그것을 놀이의 일환에서 수용케 한다. 이 와중에 웃음의 정도는 차이가 컸는데, 이시은이 퍼포머로 나선 지젝 편이 제일 웃겼다고 하겠다. 웃음의 포인트는 (즉각적이기에) 매우 정확하다. 그것이 어느새 합치됨/동기화될 때의 영역, 그 어떤 순간을 현재의 사건으로 (스크린으로부터) 옮겨 오는 경우에 그렇다. 곧 우리는 저 배우와 같이 스크린에 속해 있게 된다. 전적으로 스크린에 속해 있는 것이다. 이는 대본이 있는 연극인 셈이다.
이민경은 투명한 스크린에 배우가 될 자격-관객이 지원할 수 있으며 이는 즉석에서의 선택에 의해 가능하다-을 부여하고, 이 장치dispositif를 이야기하며, 작용 원리, 나아가 게임의 원리를 이해시키고, 더 잘 짜인 극의 지향이 아닌, 민주주의적 아고라 주체의 지위를, 연기하는 배우의 자리를 획득하는 관객으로 자리 시킨다. 가라오케, 가짜 오케스트라는 이렇게 구성의 원리 또는 규칙의 영토를 지시하며, 그 연단의 자리를 비워 둠으로써 일종의 합치된 구성원들로 이뤄진 악단을 그 규칙에 따라 구성한다. 사실 여기 동의하지 않는, 합의 의사가 전혀 없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다만 그 포괄적인 층위의 관객으로의 열림의 상황과 같이, 이런 표현적 제스처만큼은 관객이 의식하게 된다. 자유를 부르짖는 존 레논의 영상은 실상 정치적인 게 아니다. 그 무른 반응과 같은 ‘중단 없는’ 발화 작용으로서의 예술-행위만이 있다는 것, 예술의 한계와 한계로부터의 가능성을 지시하는 것 아닐까.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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