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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이 곤조, <아라네스프의 시간>: 주체의 영점에서
    REVIEW/Interdisciplinary Art 2015. 7. 27. 15:56

    ▲ 게이 곤조 <아라네스프의 시간> 게이 곤조

    사각 링 안에서 관객은 일종의 환영을 본다. 주변의 네 개의 천은 바람에 따라 유동하며, 거기엔 조각배를 저어나가며 비치는 네 개의 분절된 입체 풍경이 투사된다. 이 영상은 그러니까 바람에 천의 유동을 반영한다. 영상은 같이 흔들린다. 우리는 영상에서 잠기지 않는 주체의 자리, 흔들리는 지점에 있으며 바람의 기울기가 시각화하는 풍경에 따라 정위할 수 없는 몸을 환영적으로 인지한다. 바깥은 그렇게 담긴 채 열려 있다. 과거의 재현적 시간이 영상으로 인해 현전된다. 여기에 바깥의 소리, 보이지 않는 소리가 그 환영적 공간의 틈새를 뚫고 다다르는데 이는 내면의 소리로 전이되기 위한 듯 보인다. 흘러가는 흐름을 통과하는 감각만이 있다. 말은 물결과 바람 속에 휩쓸려 간다. 그러면서도 입체적 자국으로 남는다. 수많은 시의 파편들은 게이 곤조의 절실한 말로, 내면적 울부짖음으로 과도해지며, 그것은 간극의 사유가 아닌, 자극의 상연으로 어쩌면 이는 이 물질과 바람을 버텨나가기 위한, 그것을 응대하는, 또는 그것에 저항하는 무의식적 말들의 잔치일 수 있으며, 결국 사라져간다. 사실 이 시는 어떤 한 소녀의 죽음 이후 게이 곤조에게 당도한 편지에 대한 윤리적 대응이며, 그것의 영매적 체현의 연장이었다(라는 것을 그의 개인전을 통해 알았다). 


    아라네스프는 그리스/라틴의 한 신비로운 신화 속 단어로 보였지만 실은 심부전증 합병증의 일환에 의한 쇠약해진 정신의 해소 차원에서의 불가피한 대처 약품과 같은 것이었다(이러한 설명은 아무래도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말을 초과해 신체적인 무엇으로 전이시키는 것은 타자적 실존을 상상하는 것으로는 부족해, 마치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지 못하고 모두 그 바깥이 있었던 것처럼(우리가 우리를 볼 수 없듯-단지 바깥만을 보듯- 게이 곤조 역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우리를 지우며 몸에 불현듯 닿고 만져지는 것들의, 거기에 웅얼거리는 말들의 생채기를 내는 천이라는 벽이자 투과막이 만드는 작업의 의미로 연장되는 듯 보인다. 그러니까 우리는 시가 과소가 아닌 그 과도함으로 인해 시를 포기하며 마찬가지로 어떤 불가능한 시간에 요동치는 경험만을 하는 것에 그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가 (영상에서) 도달한 헤테로토피아의 이질적 공간은, 헤테로크로니의 시간을 거쳐 도달한 비장소로, 거기에는 어떤 삶의 지표도 없다. 다만 물의 일부에 진입한 목격자로서 유령적 형식으로만 거기에 자리한다. 마침내 환영적-실재적 막이 걷히고 두 개의 마력적 오브제들을 목격하게 되는데, 기괴한 유기체적 식물이 하나, 두 개의 모래시계가 다른 하나다. 수없는 입자가 가라앉는 모래시계는 영점의 운동을 반복할 뿐인데, 그것은 뒤집기로부터 시작된다. 곧 너와 나의 자리를 바꾸는 것에 자리를 두며, 수많은 시간의 신화를 상징적으로 실재화했다기보다 그런 윤리적 전위를 무의식적으로 이 작품이 시도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 아닐까. 결국 울렁거리는 강 표면과 흔들리는 바람과 방향을 알 수 없는 지향과 알 수 없는 목적지는, 아무것도 낳지 않는 무위의 움직임이며 오히려 하나의 영점을 향한 무한한 운동에 다름 아니다. 끝(목적지)은 다시 시작(원점)으로 회귀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의 과도함은 모든 자극의 한 일면이며 촉각적으로 몸을 감싼 하나의 매체 일부로서, 그 모든 것을 감각적으로만 구체화하며 그것을 둘러싼 실재적 감각들의 일면에 맞서는, 아니 그것과 한데 엉키며 분포하는 의식의 누수이자 형해화되는 오로지 유일한 자기지시적인 구체적 조각들이 아닐까, 곧 주체가 사라지며 남는 하나의 증거들. 무의식적 방기로서 닿을 수 없는 도착지의 불가능성을 수용하는 무위의 공산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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