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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헨 롤러 <그림문자>, 다만 이것은 하나의 음악-춤의 리듬과 속도!
    REVIEW/Dance 2015. 6. 20. 13:05

     

    요헨 롤러 <그림문자>, 사진 제공=국립현대무용단(이하 상동)

    가령 두 사람의 얽힘에서 상하의 위치 전환의 양상과 그에 따라 달라지는 음악의 판은, 일종의 몸이 시각적으로 드러난 기계 버튼이 된 디제이 믹싱의 변전에 다름 아니었다. 이는 전체적으로 보면 음악과 맞물린 무대가 몸을 촉발하고 움직임은 그 음악에 합당한 지점에 위치함을 의미한다. 음악은 몸을 위한 일종의 수많은 참조자료들의 성격을 띤다. 단지 음악과 춤 그 하나로 합쳐지며 무한하게 달려 나가는 무대가 주는 쾌감은, 곧 변화에 있었다. 어떤 과거나 돌아감 따위는 없다. 의식을 갖춘 주체나 존재 양상도 찾을 수 없다.

    ‘구성은 없다!’ 다만 뭔가 흘러가는 양태들만이 있을 뿐이다. 이 단순한 무대 구성의, 그러나 화려한 흐름은 감각을 완전히 사로잡기에 이르렀고, 아니 그 무대 내에 의식을 머물게 했다. 탈각된 의식이 변화 안에 자리했다. 이 공연이 그토록 재미있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가? 앞서 두 존재의 얽힘과 전복이 일종의 시각적 사운드 조작의 버튼이 된 것과 같이, 음악-춤 기계가 된 몸들은 음악이 갖는 정동 자체를 체현했다. 음악은 곧 배경음악이 아니었으며, 음악 안의 어떤 캐릭터를 구축하는 것, 곧 ‘저 음악이 내 정서를 함축하거나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야!’라는 것 따위 역시 없었다.

    다만 이것은 하나의 몸을 구성했다. 곧 표정을 구사하지 않고 하나의 포즈를 다변화시키는 식으로 작동했다. 어쩌면 이 음악이 트랜스를 이끌어내는 테크노의 계열들에 속한다는 점에서, 나아가 그 질감과 온갖 행위와 수집된 것들, 소음의 양상까지도 상하 관계가 아닌 배치의 미학으로, 또 연결 접속의 무한한 흐름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단지 어떤 속도와 리듬의 성취만이 지속적이고 한편 반복적으로 이뤄지는 것과 같이, 춤은 그것과 나란하게 마치 그 음악을 처음으로 몸을 통해 시각적인 상으로 구현했을 때처럼, 한 번도 이 음악이 실제적으로 성취해내지는 못했던 것처럼,  어떤 이상적인 그림의 다변화된, 입체적인, 또한 다층적인 도상 기호들을 폭발시키고 있었다. 곧 무용수들은 하나의 기계이면서 동시에 각기 다른 기계로 병렬 접속되고 다시 사라지며 또 다른 존재로 등장했으며 이는 음악의 달라짐만큼이나 그저 자연스러웠다.

    처음 뒤집기를 한 두 무용수는 각기 남성과 여성의 성별을 지녔는데, 이 둘의 움직임은 단연 놀라웠다. 가령 마돈나의 보그 뮤직비디오랄지 보깅이란 팔 위주의 동작에 강세를 둔 춤의 계열을 마치 누군가는 수어에 가깝게 구현하고 있을 때, 그는 한층 보깅에 가까웠고, 아니 화장을 하듯 디테일하게 얼굴을 하나의 표면으로 감촉하는 놀라운 터치 감각을 보여줬는데, 이 모두를 포함한 커다란 하나의 장면은 이 음악 안에 정확히 녹아들어감이었다.

    또한 ‘뮤직비디오’의 매끈한 영상 편집의 효과와 같이, 이는 정말 실제라기보다, 또는 실제를 보고 있다기보다 그 환상적인 하나의 장면에서, 관객 스스로가 그 표면을 만지고 있음의 감각으로 확장되고 있었다. 기계처럼, 또한 표정 역시도 무표정하게 그것을 반복하고 있었고 그래서 오히려 그것은 그저 하나의 표정 자체로,  그것을 포함한 무대 자체가 하나의 뮤직비디오로 확장되고 있었다.

    다른 무용수들의 경우에 갖는 무표정은 소위 퓨처리즘적 도상에 가까운 의상 속에서 무표정한 패션모델의 양태에 가까웠는데, 단지 런웨이 끝에서 관객을 무표정하게 쳐다보는 것은 ‘이것이 무대입니다!’라고 지시하는 메타적인 풍모의 것도, 현대인의 실존적 방황 따위를 은유하는 것도 아닌, 마치 하나의 마지막으로의 수렴을 위한 예비 단계, 곧 그것의 예시에 다름 아니었는데, 곧 또 하나의 화면적 터치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금박이 떨어지는 수분의 정지 동작과 그 화면을 위한 것이었다고 봐도 무방할 듯했다.

    어쨌건 그 둘 중의 또 다른 한 명, 곧 여성은 놀랄 만한 허리 돌리기와 어정쩡한 자세들을 역시 무표정으로 일관한 가운데 그것을 가져갔는데, 유독 허리를 드러낸 의상에서 잘록한 허리의 어떤 취약함은 단지 서 있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정도로 허리와 엉덩이가 붙는 듯한 연체 동물적 기계의 놀라운 활약상을 보여줬다.

    이 무대의 놀랄 만한 재미는, 다만 즉각적인 구성만이 있고, 입체적인 시청각상의 구현이 있으며, 음악을 지시점으로 삼아 싱크를 정확히 맞추는 디제잉적 변전의 맞물림이 있다는 것에서 충분히 가능한 것이었다. 이렇게 다만 동시대의 춤이 (정말 동시대의 춤으로 기능하는 측면에서) 감각적으로, 다만 흘러만 갈 수 있을가? 어떤 징후나 원한감정 따위로 달아나지 않고서.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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