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준 2015.03.25 16:09

9회째를 맞는 페스티벌 봄이 오는 27일(금)부터 4월 19일(일)까지 열린다. 12개국(노르웨이/독일/말레이시아/불가리아/세르비아/영국/인도네시아/일본/프랑스/필리핀/한국/호주) 50여 명의 아티스트들의 참여로, 총 30개의 작품이 서교예술실험센터, 문래예술공장, 인디아트홀 공, 구로아트밸리 예술극장, 서강대 메리홀 등을 찾는다. 올해 페스티벌 봄의 주제는 ‘상호참조(Cross-Reference, 相互參照)’로, 작가-작품-관객을 레퍼런스로 삼는다. 이는 SNS와 같은 파급력을 지닌 매체 특성에 기인한 작품의 맥락이 재-발현, 재 포맷되는 현상에 상응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곧 이를 통해 작품의 맥락이 확장되거나 변형되는 과정까지를 하나의 작품으로 볼 수 있는 여지를 상정한다. 이승효 페스티벌 감독은, 기자회견에서 동시대 예술, 곧 c(/C)ontemporary art를 소문자, 대문자로 분별하면서 전자를 서구를 제외한 아시아 예술, 후자를 서구의 동시대 예술쯤으로 정의했는데, 이를 다시 옮기자면 전자를 다-지역적 현재 예술들로, 후자를 그 이름 자체를 선취하는 서구의 현재 예술로 풀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기존의 ‘동시대’를 해체하며 분별하여 다-지역적(=시차적이 아닌 상이한 시간들에 가까운) 동시대(con-tempo-rary) 예술의 (담론) 장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로 보인다. 상호참조는 그러한 상이한 시간/지역들의 차이를 공존하는 것으로 확장해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에게서 코멘트(comment)를 받아 기존의 리뷰를 인용하는 것 대신, 프리뷰 성격의 작품 진단을 받은 것 역시 이색적인 시도로 보이는데, 이 역시 트위터와 같은 ‘재잘거림’에 가깝고, 무겁기보다 가벼운 글, 완성도를 요하지 않는 솔직한 개인적 의견의 성격을 띤다. 그리고 이는 작품에 대한 대부분의 프리뷰/정보를 삭제/대체하고 있다(따라서 프리뷰 글 역시 개인적 코멘트로 갈음한다. 여러 공연들에 대한 필자만의 특색이 느껴지는데, 방혜진 필자의 코멘트가 그 중 가장 주목할 만하다고 보인다).

 

ⓒWoopsYang

패셔니스타워즈(웁쓰양): 패셔니스타와 스타워즈의 절합된 구문은 포스터에 평평한 입체로 기입되는데, 그 안 제다이의 광선 검의 대결 구도, 아니 들어갈 수 없는 문의 프라이버시의 사적 영토는, 공공적 성격의 거리에서 벌어지는 혼돈의 주체-관객의 산만한 공연 양식 그 자체의 발화(와 그것의 메타적 관객 산출-관객 아닌 척 바라보기)를 예상케 한다.

 

ⓒthe artist

멈출 수 있는 미래의 환영(차지량): 여기 난민으로 호명되는 관객은, 일종의 가상-실제의 국가의 일원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시스템을 이야기하기 위해 시스템을 만드는 셈인데, 여기서 그것을 전유하고 유희하는 개인은 하나의 시스템으로부터 ‘고립’되어 있음을 인지하면서 새로운 시스템의 생산자-주체의 영예를 안게 된다. 곧 멈출 수 있는, 통제 가능한 미래, 그 시뮬레이션(환영)을 만나게 되는 것이 이 공연의 목적/목표/의도쯤으로 보인다. ‘체념과 조소’(이로)는 사실상 두 개의 시스템의 무-분별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이며, 희망으로서 환영(-한편으로 ‘조소’와 맞닿아 있는)은 실상, 다른 시스템의 시뮬레이션쯤이라는 데서 오는 ‘체념’에 맞닿아 있다. 미래(-아직 오지 않은)는 멈출 수 없다는 점에서, ‘멈출 수 있는 미래의 환영’은 ‘멈출 수 있는, 미래의 환영’으로, 끊어 읽기 할 때 현재의 시선으로 돌아올 것이고, 이러한 감상은 이 작품에 대한 거리 두기의 장치가 이 공연에 어느 정도 녹여져 있는지를 확인해야 하는 면에서, 앞선 ‘고립’, ‘체념’, ‘조소’는 어쩌면 이 작품을 재현 그 자체로만 보는 가운데 나오는 감상의 차원에 가깝다고 보인다.

 

ⓒthe artist

아이-큐어(이보 딤체프): '시간을 활용'한다는 표현 등을 봤을 때 이보 딤체프는 동시대의 관객을 적극적인 소비-주체로, 자신을 스스로를 광고하는 미디어의 스크린으로 위치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곧 관객은 TV가 아닌 살아 있는 주체의 대화술 속에서 유동적인 시간과 맞물리는 경험을 선사할 것으로 보인다. '나'는 치유될 수 있는, 곧 치유되어야 하는, 치유될 것이 선행되는 주체가 아님을, 오히려 그 치유를 능산적으로 가져갈 수 있는 주체임을 그의 수행을 통해 감각하는 것이 이 작품의 거의 다가 아닐까. 

 

ⓒthe artist

공동양행 : 뭅!뭅!뭅! + 백 바퀴 백 바퀴(웍밴드 공 + 한받과 쌈장들): 백 바퀴는, '동네 한 바퀴'의 공통 장소common place에서의 움직임을 상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곧 거리(에)의 아티스트인 한받의 극장 바깥의 퍼포먼스들이 극장으로 왔을 때 100바퀴쯤 돌아야 하나의 동네에서의 현존이 만들어진다는 것쯤으로 이 제목의 과잉을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the artist

비싱 : 인도네시아의 노이즈 음악(아디티아 우타마): 앞서 말했듯 이를 우리가 아는 동시대의 노이즈 음악 신으로 받아들여선 안 되고, 다만 그 지역성 자체와 얕거나 깊은 동시대성의 감각의 절합된 양상 하에 이를 주/객관적으로 위치시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보인다. 노이즈 음악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음악에서의 매체의 은폐 작용을 가리키고 있으므로, 그럼에도 그 이름 자체가 이미 너무나 친숙하므로 이를 단순한 존 케이지와 같은 클래식한 역사의 정점의 차원으로 소급해볼 필요는 없다고 보인다. 그냥 음악이라고 보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 굳이 ‘음악(하기)에 대한 논평’(김소연)으로 지적인 얼개를 작동시킬 필요 없이.

ⓒHeine Avdal
 
필드워크 : 오피스(하이네 아브달 + 시노자키 유키코): ‘장소특정적-관객체험형-퍼포먼스란 말은 따분하다.’(서동진)라는 말은 옳은 반면, 한편으로, 장르의 시차가 분별되지 않은 코멘트로 보인다. 덩그러니 놓인 책상과 그 위의 사물들의 정경은, 디자인적 어포던스를 체현하는 식으로 관객에게 일상을 조금 더 낯설게, 그리고 무용수의 몸을 접고 펴는 식으로 밀접한 공간에서 한다는 데서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곧 장소 특정적이기만 한 공연이 아닌, 장소 특정적일 수밖에 없는, 장소 특정적이기에 나오는 공연이라면, 그리고 작품의 아우라가 관객(의 장소)을 침범하는 경험이 아직까지도 의외로 작동하지 않는 장르가 무용이라면, 그것은 다시 제고될 필요가 있는 부분이다.  

 

ⓒPierre Fabris

온몸으로(디미트리 샹블라 + 보리스 샤르마츠): 유럽을 대표하는 안무가 중 한 사람인 프랑스 출신의 안무가 보리스 샤르마츠는, 1993년에 디미트리 샹블라와 함께 만든 첫 작품 <온몸으로>와 티노 세갈이 극장에서 만든 마지막 작품을 2013년 재창작한 솔로 퍼포먼스 <(무제)(2000)> 등 두 작품을 선보인다. 

샤르마츠는 백남준아트센터에서 퍼포먼스를 한 적이 있다. 정동/현존이 아닌 배치를 통해 기능하는 안무로 보인다. 이러한 작품을 동시대 미학 신에서 설명하자면, 명확한 주체가 아닌, 기능하고 분별되는 주체, 사물-공간과 뒤섞이는 것에 방점을 찍는 주체-대상의 시지각적 몸들의 향연쯤으로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무제) (2000)(컨셉 : 티노 세갈 해석 : 보리스 샤르마츠): 티노 세갈의 작업들이 그러하듯, 개념을 비의적으로 전달한다고 해야 할까. 여기서 샤르마츠는 세갈의 매체인가, 아님 작업의 재창안으로 이어지는가의 의문들.

ⓒJemima Yong

포레스트 프린지(션 히어로 + 리차드 데도미니치 + 타냐 엘 쿠리 + 아비가일 콘웨이 + 앤디 필드): '아티스트 커뮤니티'를 통한 다른 국가/지역을 파쇄하는, 그럼에도 그 다름으로부터 출발하는 식의 상호 참조는, 실상 자유로운 협업의 확장쯤으로 보이며, 관객과의 밀접한 교류를 퍼포먼스의 주요한 부분으로 두는 것으로 보인다. 각 작가들의 작업이 흥미롭게 다가오며, 각각의 아티스트가 상호 참조되며 지역적인 것이 또 다른 지역적인 맥락의 관객들과 얽히면서 발생하는 이야기가 꽤나 개인적인 경험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winter guests 

코리엔테스 애비뉴 – 더 무비(앨런 오연 & 윈터 게스트): 무용가들의 움직임을 통한 재현이라면, 이것은 사실상 변형되는 기억-사실과 육화된 시간, 재현될 수 없는 과거, 곧 현재를 가리킨다고 보인다. 노르웨이 아티스트에 대한 흥미가 들며, 페이크 다큐보다는 시네마 베리떼-렉처 퍼포먼스에 일견 가까운-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된다. ‘프리뷰 스크리닝’이라는 정보가 조금 걸린다.

ⓒK.YOUNG

오더메이드 레퍼토리 쾌(이희문): 지난 무대들을 보자면, 이희문은 걸쭉하면서도 쾌활하며 뜨겁게 휘발되는 특유의 음색과 화려하고도 입체적인 무대의 시각적 배치를 한데 두는 식으로, 민요/잡가를 관객과 정신없이 뒤섞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보였다. 이희문-안은미-장영규가 하나의 판에서 디스코텍 돌아가는 조명처럼 마구 그러나 실은 절제되어 돌아가며 펼쳐지는 광경의 무분별함 따위를 과잉으로 섭취하는 데 그 진면목이 있다 하겠다.

ⓒSarah Walker

정부(시팟 라윈 + 데이빗 피니건 + 크리에이티브 바키): 이 작품은 차지량의 작업을 참조해 볼 수 있을 듯하다. ‘이상적 사회’라는 것이, 구성될 수 있다는 것(가상)과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사회 비판)은 다르지만, 그러한 이념/테제가 숨기고 있는, 가령 예술이 사회에 갖는 구원의 총체적 함의에 거는 기대만큼은 이 작품이 공유하고 있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쉽지 않은 부분이다.

ⓒthe artist

아라네스프의 시간 / 물 때(게이 곤조): 게이 곤조(“체코/동성애자/혼혈아/작가라는 요소로 정의되는 가상의 인물 ‘게이 곤조’”_이로)는 그 이름이 주는 신비-기괴-호기심만큼 알려져 있지 않은 듯하다. 지난 활동들의 흔적을 인터넷상에서 간간이 찾을 수 있으며, 시각예술을 적으로 두고 있지만, 1인 밴드로 노래를 하며, (목)소리로 시각예술 작가들의 작업에 참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대단히(?) 젊은 작가이며, 작품 설명만을 놓고 보면, 다른 작업들에 비해 가장 서정적-극적-낭만적이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곧 아주 좋거나 망하거나. 장소 특정적인 ‘서강대교 북단’에서의 공연이라는 점도 하나의 변수로 작용할 수 있을 듯하다. 밤섬은 근대의 은폐된, 근대에 부수된 야생의 언캐니 공간쯤의 개념으로 픽업된 듯하다.

ⓒthe artist

말레이시아 데이(먼카오 + 치투 + 렌진) : 파이브 아트센터의 아카이브를 열람한다는 기분으로 보면 좋을 듯하다. 어쩌면 소위 가장 ‘구린’ 작업일 수도 있다(10년간의 ‘변방’의 한 기록들)-유럽 컨템퍼러리의 관점에서 보면. 반면 역설적으로 아시아의 컨템퍼러리라는 점에서, 이번 페봄이 말하는 ‘상호 참조’ 삼기에 가장 좋은 작업으로 보인다. 어쩌면 그 부분이 주요하게 페봄2015의 의미-과제라는 점이 딜레마 아닐까. 

ⓒRanda Mirza

평화 가라오케(이민경): 이민경의 작업은 홍은예술창작센터에서 태업의 형식으로 벌어진 적 있다. 여기서 오노 요코-존 레논 듀오의 이미지들이 활용됐다. 이는 무위자연식의 이념과 결합됐는데, 서구 뉴에이지-히피적 감성을 동양철학의 주요한 부분으로 여겨지는 바가 표피적으로 보이며 키치적이라는 느낌을 줬다. 아마 안무가가 만드는 작업이라는 느낌이 잘 들지 않는 가운데, ‘펼쳐놓는 이미지-수행’의 과정에서 오는 잘 감각되지 않는 것을 감각하는 게 관건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Benjamin Krieg

서랍(쉬쉬팝): 베를린과 함부르크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퍼포먼스 단체 쉬쉬팝은, 관객 참여를 작품 제작의 중요한 원동력으로 삼아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이슈 들을 탐구하는 극단으로, 이번에 선보이는 <서랍>은 동독에서 자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간직한 사적이고도 정치적인 텍스트, 이미지, 음악 들을 연대기적으로 분류한다. 각각 3명의 서독과 동독 출신의 삶이 그를 통해 조합된다고 한다. 이미지만 놓고 보면, 지난 2009년 페봄, <자본론>의 기시감이. 빠른 전개에, 독일식 맥락이 깃든 대사들이라 이해하기 어려운 반면, 분단 상황에 있는 우리나라가 가장 이해하기 좋은 극(이승효 감독)이라는 설명을 따른다고 해도, 다소 지루하고 건조한 공연일 것 같다는 느낌적 느낌이. 표가 제일 비싸다.

ⓒ목진우

저장된 실제(황수현): 유일하게 국내에 미리 시현돼 사전에 본 작품이다. 이것이 매체로 번역돼 동시적-양가적으로 펼쳐진다는 식의 소개에 너무 의지하지는 말자. 제목에 대한 함의는 최종적으로만 판단되는 데 가깝다.

ⓒSOI48

아시안 뮤직 파티 – Soi48, 하세가와 요헤이, 디제이 소울스케이프(박다함): 아시아 인디뮤직-사운드 신과의 교류/매개에 앞장서 오고 있는 박다함의 기획. ‘아시아의 음악’, 곧 일종의 담론 지형으로서 아시아의 사운드스케이프를 가늠/성찰하는 자리로서 의미 있지 않을까. 표피적인 ‘매개의 매개’가 아닌 불가능한 매개를 성찰하는 ‘매개에의 매개’라는 생각이 드는 작업으로, 한국에서 한국을 이야기하는 하세가와와의 결합에서 볼 수 있듯 ‘상호 참조’의 성격이 가장 긍정적으로 발현될 수 있는 자리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페스티벌/도쿄 in 서울 - 모시이타 & 미스터 크리쳐(하타사와 세이고 & 모리카와 히로카즈 + 스기야마 이타루): 이미지만을 놓고 보면, 전자는 (진부한) 커뮤니티 아트, 후자는 감정 주체의 낭만적 재현극 같은 느낌을 주는 관계로 보고 싶지 않긴 하다-보이는 이미지는 작업을 판단하는 데 주요한 기준점이 된다. 전자는 2011년의 도호쿠 대지진과 관련된 작업이라고 하는데, 지축이 흔들리는 경험과 재난 상황은 일본(과 예술가들)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 보이며, 그런 부분에서 유념해 볼 만하다. 한편, 페스티벌 간의 협업이라는 측면에서 의미를 둬야 할까. 페스티벌 도쿄가 서울에서 자체 제작으로 들어오는 작업이라는 점이 꽤 의미가 있다고 보인다. 곧 작품을 사와서 소개하는 게 아니라 다만 작업을 선보일 공간만을 열어주는 것이다. 이런 부분은 꽤 혁신적인 축제 운영 방안이라 생각되는 부분이다.

 

ⓒthe artist

취향의 정원 파일럿 토크 : 인체드로잉I(모시그라운드): 다 같이 참여하는 사생대회인가, 최근의 이슈/관심사를 떠드는 자리인가, 페봄에 참여하는 작가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뤄지는 작업이라고 들은 것 같지만, 보기 전에는 파악 불가한 작업.

멜리에스 일루션 – 프롤로그(이은결): 지난 페스티벌 봄에서 유일하게 봤던 작품이 이은결의 프레젠테이션 성격의 마술 쇼였다. 마술을 마술사로 정리/요약(하는 것 역시 속임수)하는 것이 흥미로웠고, 사실 그 전에 정연두 작가와의 협업은, 정연두 작가가 이은결을 참조했지만 실은 자신의 기존 작업을 확장하는 데 이은결을 매체 기술자로 활용했다는 생각을 들게 했는데, 지난 작업에서 보니 이은결은 그냥 마술사라기보다는 아티스트의 자기 세계/개념을 갖고 있는 작가였다. 이번 작업은 지난 작업의 단순한 확장일까. 한편, 정연두 작가의 '마술'적 작업들과는 다르게 어떻게 자기 작업을 개념화/프레젠테이션하는지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고 보인다.

여기까지 놓고 보면, 서구 작업들은 지난 김성희 예술감독 당시의 페스티벌 봄(그보다 백남준아트센터 프로그램 기획과 더 유사해 보인다)의 버전, 아시아에의 무게중심은 이승효 감독의 의지이자 역량이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전자는 '쿨한 것'들-봐도 후회하지 않을 가능성이 큰 작업들(그 중 두 개만 꼽는다면 샤르마츠와 쉬쉬팝, 하나 더 꼽자면 티노 세갈-샤르마츠), 후자는 소개되고 읽혀야 할 것들. 포레스트 프린지나 비싱, 아시안 뮤직 파티, 페스티벌 도쿄 같은 작업들은 봐야 하는, 약간의 의무감이 드는 작업들이다. 차지량, 박다함, 이민경, 게이 곤조 등의 작업은 한국 다원예술의 현재 좌표-미래를 가늠하는 측면에서 한번 보는 게 의미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기대는 반반이다. 단, 박다함의 기획은 재미-의미가 다 있을 것 같은 생각에 예외. 페스티벌 봄 2015는 축제-이승효 감독의 기획적 역량, 한국 젊은 작가들의 시도, 소개되지 않은 서구 아방가르드 작업들 등 다채롭게 느껴진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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