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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러스트무용단 <계보학적 탐구> '역사 바깥에서'
    REVIEW/Dance 2014. 12. 29. 10:36




    ▲ 트러스트무용단 <계보학적 탐구> [사진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이하 상동)


    설경 아래 기차 여행의 실제 무대에 트랙을 또는 기차 장난감으로 끝나는, <계보학적 탐구>는 어둠 속 바퀴 달린 이동형 낮은 의자를 타고 등장한 존재자들은 무대 옆에서 물속을 헤치고 유영하며 시작한다. 무대 중심을 차지하기보다 거대한 풍광의 측면을 이루는 인간에 대한 망원경적 시선은 개인이 아닌 인류를, 디아스포라로서의 타자적 주체와 그 삶을 반추하는 듯하다. 그 안에서 발화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이는 어떤 장면의 표면을 이루는 기억들이고 역사의 한 전형에 가깝다. 


    이들이 군집하는 몇몇의 길지 않은 순간은 무대가 흘러갈수록 탄생을 나타내는 것에서, 역사를 찢고 나오는 인간의 새의 날갯짓을 표현형으로 구성한 것으로 나아간다. 여기에는 과또한 힘이 부여돼 있고 그 힘을 버티고 서는 무용수들의 몸짓에서, 통시적 시간대를 관통하는 인류의 무한한 생명력과 접변하는 역사의 이념형으로서의 현전이 가능해지며 그에 대한 시야가 확보된다. 


    이처럼 가볍지 않은 구축의 몸짓들과 주변화함으로써만 성립하는 떠돎의 몸짓들은 가상의 역사적 시간의 둘레에 묶여 있고 이를 통해 계보적 인류의 삶을 추상적이고 너른 범위에서 특정화해낸다. 이는 일종의 본 듯한 광경들이고 또는 그것으로부터의 변주이다. 



    필름 영사기의 수레는 헬멧에 연결할 수 있는 주입기가 달려 있고 이는 통해 기억(역사)은 주입된다. 이는 말 그대로 기억을 주입하는 동형적 인간들의 주조와 이를 통제하고 지배하는 디스토피아의 미래 시점을 향한 것이라기보다 그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인류의 ‘예속된’ 삶을 가리키고, 그렇게 독자적 개인 주체를 구성할 수 없음에 대한 우화적 광경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정신없이 떠도는 기표, 역사의 주체가 아니라 역사(에)의 구성 놀이는 그 역사에 편입되는 따로 또 같은 인간들은 개성과 자아를 주장하지 않는다. 푸코의 언어에 가까운 제목과 그 내용은, 그 몸짓들의 특정 시대의 편린·흔적으로서의 탐색을 향한다기보다, 그 역사들을 오브제의 변용의 계보 속에서 접붙이는 콜라주 타입의 나열로 가져가는 데 가깝다. 


    이것은 움직임이기보다 (이념형을 그려 내거나 인류를 상징적으로 도상화한) 몸짓들이고, 그럼에도 목적적이기보다 또는 유형화되기보다 너른 시간의 공백 자체로 드러나는 한갓된 기호들로 대체로 휘발된다. 곧 무대는 역사의 한 평면들이고 어떤 연결되지 않는 부산함과 자취로만 기록되는 부단함으로 중첩되고 이 과거-현재-미래의 반복되는 시간 터널에서 주체 없이 떠돈다. 


    이는 주체의 보이지 않는 이행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역사라는 주체의 아련함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놓인 무대를 이루는 긴 시간만이 아닌 보이지 않는 역사의 시선인 것이다. 곧 스크린 바깥의 열차 바깥에 놓인 ‘존재’들은 역사가 그 역사 바깥의 인간에 의해 기록될 수 있음을 보증하는 가상의 주체로 자리하는 것이다. 



    이 역사의 이전(以前)은 미래적 역사의 이전(移轉)을 현재의 자리에서 예지하고 선취하여 여정을 마무리, 또는 시작하는 식으로 끝난다. 계보학적 탐구는 계보학적 탐구(의 시점)이 아니라 계보학적 탐구의 메타 시점에 가까울 것이다. 결과적으로 탐색의 내용들은 가상에 가까웠고 역사의 구성적 시점 곧 포스트모던적 해체의 서사에 가깝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아이러니, 혹은 특질이 있다. 하지만 곧 그러한 전형적 역사의 재현은 왜 그럴 듯한 표면으로 벌어져야 하는 것인가. 결과적으로 그 계보학적 탐구가 계보학적 탐구 자체로서 재구성된 역사를 구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달리 유예된 시점이 완성에 귀착하기 때문이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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