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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수현 안무, <저장된 실제>: ‘편집적 리얼리티의 세 가지 방식들’
    REVIEW/Dance 2014. 12. 28. 21:59



    ▲ 황수현 안무, <저장된 실제>에서 무용수 강호정 [사진제공=황수현] 


    세 개의 방에 세 그룹으로 나뉘어 작품이 이뤄지고, 균등하게 그 수가 나뉘어 관객이 동시에 각각의 방으로 입장한다. 세 개의 방(방1-장홍석, 방2-공영선, 방3-강호정)에는 각기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저장된 기억과 저장된 몸


    장홍석은 불이 켜지면 옷을 벗는(그리고 불이 꺼지면 다시 입는) 일련의 움직임을 반복하여 동일한 순간에서 오는 기시감을 준다. 지난 현재가 현재로 재생되는 순간은 시간 축(에 대한 감각)을 이전으로 되돌리고, 시간의 유예, 영원한 현재에의 위태로움 속의 어둠으로 지연되는데, 이 현재가 다시 찾아옴의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가령 그 순간은 현재에서 벗어나며 진정한 ‘미래’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곧 다시 찾아오는 현재 바깥으로 현재가 과거의 반복이자 예견된 미래의 반복인 버퍼링된 장면이 의식되지 않은, 저장되지 않은 실재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점등의 on-off 가운데 장면-움직임의 재생과 차이의 변주로 점점 옷을 벗고 이동해 누드가 되는 과정이 이어진다. 어둠이 시간을 삼키고 기억을 만들고 현재를 시차적으로 재구성하는, 잘게 쪼갠 것들의 연속으로 만든 일종의 필름은 시간의 의식적 재생이자 그 속의 편집적 구성이다. 어둠을 통과해서는 시각의 불가역적 시간의 전개가 일어나서는 안 되고 다만 앞(현재)으로만 돌아갈 수 있는데, 중간에 어둠 속에서도 옷을 벗는 과정, 곧 시간의 전개가 일어난 부분도 있었다. 


    옷을 다 벗은 이후 거울에 기대 웅크린 장홍석은 옷을 벗는 경로를 보여주는 분절적 전개의 편집된 매체적 기억에서 어떤 캐릭터의 내면의 저장된 실제를 가진 존재를 체현한다(이는 다분히, 유일하게 감상적인 부분이다). 팽팽한 균형을 확인하며 두 개의 존재-두 개의 세계를 만든다. 거울은, 아니 몸은 반영을 통해 더불어 저장된 실제를 만든다. 거울과 멀어지면서 몸은 자율권을 얻고 주체의 낭만을 벗어나 그 무늬 자체에 천착한다. 몸의 겹겹에 저장된 실제(무늬)가 있는 셈이다. 빛과 의식(의 시간성)은 어둠과 무의식(의 무시간성)의 평면으로 반전된다. 


    비인간의 움직임 메소드


    공영선은 편집적 기법의 편재 속에 시간의 반전을 가져가는 대신 몸의 움직임 축과 경로를 반전시키며 움직임을 단위로서 재구성하고 물리적인 측면의 강도를 수여한다. 한 발씩 뒤로 디디며 가상의 발걸음의 흔적으로 거꾸로 되돌아감은 움직임의 기보적 기입인 동시에 움직임 자체를 전복시킨 또 다른 움직임이다. 


    이런 뒤틀린 (경로에서 나오는) 움직임은 명확한 경로와 예측할 수 있는 흐름 속에서 의식적으로 이뤄지는-의식의 초점화 작용을 하는- 점에서 명료하기 이를 데 없으며 정확하기보다 적확해진다. 관객을 사선으로 마주하고 앞뒤의 관객을 교차해 두 번의 동일 움직임을 대체로 반복하는 것에서도 그렇지만, 어떤 경로를 거꾸로 되짚으며 의도된 춤을 추고 있다는 식의 관객과 동기화된 감각은 저장된 실제(작업의 바탕이 되는 기보)가 무엇인지 또한 확인시켜 준다. 


    이 의식적 움직임은 그럼에도 탄환처럼 튕겨나가는 움직임이나 폭발적으로 튕겨나감 속에 우발적 힘을 예비하고 있다 이내 구현하는데, 이러한 명확한 동작들이 파란 판에서의 개체의 물리적, 에너지적, 발생학적 힘의 분배라는 측면에서 정서적인 측면이 아닌, 어떤 기계적 측면(의 경이로움)을 가져가는 것에 가깝다. 


    누워서 두 다리를 좌우로 겨드랑이 쪽으로 추어올리는 가운데 머리가 뒤따라 움직이는, 곧 밑에서부터 몸이 편재·추동되는 식의 움직임은 비-인간적이고 파충류의 움직임 역학을 물리적으로 경로화한 것에 가까워 보인다. 이는 (인간의 장에서는) 새로운 움직임이 발생하는 안무(메소드)로 볼 수도 있다. 


    반짝거리는 동물 털 같은 두꺼운 상의에 검은 비닐가죽 바지는 즉물적인 한편, 파란 판 위에서 몸은 보호색을 띤 것과 같다. 곧 검은 머리-파란 옷-검은 바지는 앞뒤가 바뀐 것으로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어쩌면 다리부터 조직을 이루는 게 아니라 커다란 머리부터 움직이는 것인 것이다. 한편 점프에서도 공영선은 곧 다리를 가슴께에 붙여 뛰어, 검은 바지를 부재한 것처럼 감각케 하는 공간 부양의 기술을 시현하는 것에 가까웠는데, 의상 역시 움직임을 고려해 여러모로 치밀하게 준비된 것임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실재의 뒤틀림이 주는 충격


    강호정은 물을 머금고 시작해 갑작스런 앞돌기로 충격적 감각을 안겼는데, 검은 덩어리에의 집중이 순간적으로 시야를 덮으며 뒤집어지고, 시각 자체가 이탈하고 바로 그 전 순간(의 인식)이 뭉개지는 순간을 발생시켰기 때문이다. 세계는 그녀 외에 부재한 상태에서 그것 자체가 뒤집어지는 것이다. 


    급작스런 움직임들과 뒤로 숨의 단절로 인한 거친 소리를 내는 것에 이어 또 다른 저장된 실제로서 (머금고 있던) 물을 흘리다 쏟아내고, 쓰러져 그 고인 물로부터 입과 온 몸을 묻는다. 전체적으로 앞의 분절된 동작들은 어떤 편집의 끊김 구간에 가까워 보이고, 그와 같은 시각에서 결과적으로 물을 머금고 뱉는 가운데의 중간 과정이 그 편집의 잉여로 덧붙여진 것이고, 사실은 그 중간을 잘라내고 남은 부분이, 곧 물을 먹었고 이내 뱉는 자연스런 인과관계의 연속으로 이어지는 것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여기서 저장된 실제는 물이다. 충격의 (물을 흘리게 하는) 효과이자 충격의 잠재성과 같이 머물러 있던, 그리고 그것을 증거로 하는 신체의 연장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바닥에 엎드려 있는 멈춤의 순간이 지연되면서 앞선 시간이 다시 거꾸로 흐르는 느낌을 준다. 곧 물을 뱉어낸 게 아니라 물을 먹는 것 같은, 지금까지의 순간이 거꾸로 머릿속 의식에서 편집·상상된다(이는 장홍석의 방과 연계해서 볼 수 있을까). 


    이후로 그녀는 계속 뒤로 뒤집히는 충격을 선사한다. 머리로 얼굴을 가린 채 서 있거나 발라당 누워 발로 바닥에 타격을 가하기도 한다. 뒤집히는 움직임은, (일상에서의)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인 반면, 그래서 감각적이고, 꽤나 과격하고 파편적이며 앞선 시간 축을 거꾸로 돌리는 듯한 즉자적 인식을 선사한다. 보는 이의 의식은 몸의 뒤틀림과 같이 뒤틀린다. 


    장홍석이 시간의 편집(빛)에서 시간을 벗어나는 단계(어둠)로 나아갔다면, 공영선이 경로를 거꾸로 해 밑에서부터 움직이거나 공중 부양하며 움직임의 여러 반전 양상으로 비-인간, 동물의 감각을 체현했다면-그럼으로써 명확한 움직임의 축을 설정했다면, 강호정은 축 자체를 기울이며 파괴적 신체와 함께 시간을 어그러뜨렸다. 


    편집적 실제의 장홍석 방과 전도된 움직임의 실제인 공연선 방이 섞인, 물리적 실제가 편집적 실제의 착시를 가져오며, 잠재된 충격을 저장된 실제로 가져갔다. 공연 설명에는 3개의 방에 따라 세 개의 키워드를 가지고 있다고 (비밀인 채로) 설명되어 있는데, 그것이 직관적으로 관객에게 맡겨져 찾아야 하는 해석과 유추의 저자의 권위에서 한층 물러나 따라서 미끄러지며 ‘은유’로 기능하기보다(마지막에 로비에 모인 관객들에게 검은 화면을 통해 비디오의 주소가 담긴 문자를 전송하고 ‘저장된 실제’의 이름을 충족시키는 데 있어 충실한 태도를 보이지만, 이미 공연으로 충분하고 하나의 잉여/서비스와 같다 판단된다), 실제 영화적 시간의 틀 속에서 (기억 ‘속’) ‘현재’의 문제, 다른 움직임 축의 설정을 통한 탄성과 경로의 움직임, 거꾸로 돌리는 사건 혹은 사건으로서의 몸(판)의 반복으로 저장된 실제, 잠재된 편집-안무의 체계들을 각기 다르게 그리고 명확하게 가져갔다는 점에서 <저장된 실제>는 인상적이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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