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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배섭 <횡단보도>, 건널 수 없는 도돌이표 정세, 그리고 제도에 쓰는 자조적 편지
    REVIEW/Dance 2014. 12. 9. 10:29


    ▲ 금배섭 <횡단보도> 포스터


    한편으로는 한국 근현대사의 대통령(의 계보)의 현전/재현들과 다른 한편으로는 작품이 아직 오르기 전의 단계, 지원서 양식의 기획 의도와 작품 구상을 통한 작품의 얼개가 수직적으로 작품을 관통하고, 일종의 단락 지점들로 적용되면서, 그 중간은 횡단보도를 건너는 여러 남녀의 소극(笑劇)적 양상으로 채워진다. 


    일종의 전자가 각각 역사와 작품을 둘러싼 직접적인 연관으로서 동시적인 부분이라면, 후자는 현실 세계의 이상한 재현이고, 여러 다른 시간/관점에서의 다각적 구성이다. 또한 공시적(일시적)인 삶의 에피소드(들)이다. 삶은 지나가기보다 거의 다시 도래하는 것에 가깝다. 이러한 명확한 가짜-선언에 이은 반복-움직임의 배치는 역사는 변함없고 안무는 미묘하게 달라질 뿐 그것(역사)을 해체하거나 직접적으로 정치적이지는 않음을 의미하는 것만 같다. 곧 역사와 안무는 절연되어 있고, 또 절합되어 있다. 곧 역사와 정치와 춤은 서로의 바깥을 이룬다. 


    사실 춤이라기보다 횡단보도를 건너다 말고 결국 무대 뒤로 퇴장하며 무대 후면을 노출하고 이것이 일종의 잠깐의 규칙에 따른 놀이임을 주지시키는 것에 가깝다. 메타-인식(이는 대통령 재현 신들)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것이 대통령들과 그리 닮지 않았고, 이미 재현 같은 계보의 분석을 모두 알고 있는 상태에서 또한 모두 재현될 것임을 알 것이라는 점에서 갖는 긴장은 특별하지 않고 오히려 그 유추들의 확인 양상의 의미가 크다는 차원에서 공간은 기시감과 지루함을 동반하며 진행된다. 이것은 실험이기 때문에 물론 괜찮다. 아마도 그러하다. 


    이게 제도에게 바치는 편지(곧 제도의 시선을 상정한다) 또한 제도에 대한 상기는 공연의 해체적 결합이고, 그 누더기 같은 조각들을 가감 없이 보여주며 스스로 온전한 주체(의 역량)를 가져갈 수 없음을, 곧 이미 제4의 벽 역시 포기한 채, 이것이 공연인가 혹은 공연의 표상인가, 공연이 될 수 있는가 아님 공연이 될 필요가 있는가의 물음은, 공연으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야기되며, 그 가운데 할 수 있는 어떤 연사이자 대통령들의 재연 배우인 퍼포머의 말들은 마구 지껄이는 것에 불과한 듯 보인다. 


    곧 이는 뚜렷한 자각과 드러내기의 의도를 가져가는 반면, 이미 제도로서의, 제도 안에서의 공연, 실험이라는 것이 전무한 국내에서의 기록극으로, 무언가 온전하고 그래서 완벽한 어떤 실체 자체의 환상을 들추어, 그 해체되고 기워질 수 없는 파편들의 배치/나열에서 어떤 무언가가 발생할 수 있는가의 물음 또한 거의 그 자체가 하나의 공연의 중심에 자리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이 공연은 재(再)현을 어떤 표현의 재층위를 생성하는 같은 움직임-시퀀스의 차이와 반복, 대통령 계보의 기시감 어린 역사적 현재의 갱신-답보에서의 미묘함으로 정지된 듯 운동을 계속 한다. 그것이 이 공연을 보면서 앞선 그 ‘의문’에 답할 수 없으면서도 자리를 차마 떠날 수 없었던 까닭이다. 그것과 함께 어떤 제도와 실험의 기원으로 그 표면을 기우기, ‘지저분한 중심’을 공연 전반에 깔아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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