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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수미·허성임 <튜닝>: 연대의 틈 그리고 바깥의 언어들
    REVIEW/Dance 2014. 12. 9. 08:49

    ▲ 장수미·허성임 <튜닝> [사진 제공=LIG문화재단](이하 상동)

    장수미·허성임의 지난 작품, 필리아(philia), 곧 우정을 통해 타국에서 두 무용가의 따로 또 같이 하는 활동들에서 나오는 느슨한-지속적 연대와 그 공연들에 감응을 시험·실험하던 전작의 현장을 이어, 둘의 만남에서 이번 작품은 그들의 어떤 좌표를 그 역사에 또 그들 몸에 ‘새김’하는가. 아님 기실 전적으로 다른 실험인가 또는 유사한 어떤 짧은 호흡으로 그것과 가깝게 위치하는가.

    텅 빈 무대에 전자-기타 한 대는 연주에 대한 기대-상상을 가능케 한다면 한다. 그 기타를 손 대고 연주하며 소리 울림의 무대를 만드는 대신, 그들은 그 바닥에서 단지 그 파장이 소리로 치환되는, 사운드 역학 장에서 감응돼 버리거나 그것을 적극적으로 구성하는 위치에서, 그것에 적응하거나 저항하거나 이겨낸다. 이 소음은 록스타의 코스프레를 가능케 하는, 곧 음악 연주의 전형적 무대 공간의 상상 충족에서 벗어나지 않는 현실을 후반에 선보이지만, 그 전까지 이 기타는 그들이 담을 수 없는 어떤 경계의 규준이며, 그것을 분기로 해서 그들은 위아래 좌우로 양분된다.

    전체적으로 보면, 장수미는 허성임에 대한 낮은 목소리의 응답이다. 허성임이 그런 의미에서 시작하고 권리를 갖는 ‘주체’이고, 장수미가 반응하는 수동적 입장으로 보이지만, 이것은 위계의 양식이 아닌, 우정의 어떤 이름과 같다. 듀오를 형성하는 법, 그럼에도 각자의 길에 머물며 함께 나아가는 방식, 그래서 각자의 속도의 유지, 그럼에도 멈추지 않는 대답과 말 걸기, 곧 끝이 아닌, 시작과 중간이 있는 것이다. 이 둘이 마구 뛰어놀며 형성되는 소음/연주는 곧 어떤 이국적 긴장일 수도 있다.

    이는 뛰노는 판이 그들을 위해 수여되는 배경음악이라기보다는, 치열한 긴장의 맥놀이로 시현되며 그것을 오히려 소음이 아닌 움직임의 ‘곁’으로 파악해야만 춤이 가능함을 의미한다. 곧 그 긴장을 내재화하여(움직임을 구동하는 요소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순전히 즐기는 듯 보인다. 어쩌면 악쓰는 광경을 그들이 버티고 있는 것처럼 관객 역시 버티며(소음과 그들의 큰 변화 없는, 특히 초반의 그와 같은 광경은 온전히 지루할 수만은 없는 어떤 버팀의 지속적 순간들이다.) 그 속에서 낯선 세계, 아니 그보다 오히려 낯선 자신을 그들처럼 느끼고 있기에(또는 그것에 이미 포함됐기에), 이것의 불편함이 불편하지 않은 듯, 감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 소음 속에 섞여드는 광경으로부터 관객 역시 발을 뗄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 이들이 뛰면서 다시 땅에 닿고 그럼으로써 소음이 다시 이들을 찌르듯이. 계속 바닥의 울림과 소음, 뛰는 가운데, 바뀌지 않는 것은 이들이 관객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와 같은 시선의 차단, 거리 두기는, 이 순일한 움직임이 지속될 수 있는 중요한 ‘결정’으로부터 기인한다. 즉 의도된 것이다.

    사실 이 둘은 뒤돌아 상의를 완전히 탈의하고, 관객을 마주한다(/관객을 외면한다). 이들은 이들의 치열한 삶을 이국에 대한 그들 삶을-타자(로서)의 삶을 재현하고자 한 것일까. 무엇보다 이 뒤돎으로 인해, 이들은 꼿꼿하게 서서 출 수 있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충분히 지속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이 뛰놂을 유지하고, 점점 공간을 달리 함으로써, 거리를 좁히거나 넓힘으로써 바닥에 가하는 충격이 전자 기타의 울림으로 어떤 공간의 음향적 지평으로 전이된다. 이들은 춤으로써 (악기를 만지지 않음으로써) 불가능성의 (춤을 추면서 연주를 하는-춤과 음악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불가능함의 연주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앞으로 돌고 악기를 연주할 대에 이르면, 이 둘은 재현과 모방의 단계에 이르며, 그래서 오히려 이전의 움직임(-연주)의 지속적인, 따라서 몸/움직임의 떨림에서의 차이와 반복의 양상을 가져가지 못한다. 여기에는 어떤 자연스러움이 있다. 어떤 긴장 대신에 여유의 유희가 있는 것이다.

    이들이 서로 마주하고 또는 대치하고 주고받는 대화들은 단어들의 유사한 듯 다른 차이의 변주이다. 반복의 다른 생성이다. ‘ever’의 반복에서 ‘every’의 비약은 우선 ‘ever’의 발성/발음 자체에 강세를 둔 듣기에서, 그 말의 막다른 끝에서 ‘모두’로의 어떤 확장/변전이다. 이는 즉흥적인 구문들의 언어유희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나, 의도치 않게 확장으로서의 ‘의미’ 전환을 갖는다. ‘y’의 덧댐은 ‘never’와 ‘ever’가 껴안는 언어 유희적 장난에서의 ‘ever’-또는 잡아먹을 듯한 말의 원환 속에서, ‘every’로 숨통을 트이게 하고, ‘언제나’의 긴 시간 터널에서 모두의 지칭, 곧 현재의 세계로 비약/탈주한다. 이것이 장수미의 착 가라앉은 ‘every’로 전이다.

    입술이 닿을 정도의 밀착, 이는 ‘너’에게로의 외침이지만, 한편 나의 너에로의 반향이다. 너무 가까워 너의 얼굴은 오히려 뭉개지는 상태에서, 내가 복제·전이되는 하지만 결국 너는 나의 말을 반사하는 어떤 벽이 되고 그렇게 나의 존재가 울린다. 이 이상한 현존이라기보다 거주는 너의 곁이 아닌 ‘나의 곁’에서 증폭된다. 나와 너의 다툼이라기보다 나의 바깥을 나로 확인한다. 이 기묘한 반전·대칭은 내가 보이는 건 흐릿한 너, 그러나 그 바깥이 없을 때 출현한다. 이 나와 너의 착시, 나의 경계를 소리치는 나에게서 확인하는 (장수미가 아닌) 허성임.

    그렇다면 장수미는 (허성임에게) 어떠한 존재일까. 이는 내가 감싸고 있는 존재의 축적, 거기에 자연스레 더디게 천천히 반응하는 나란 존재의 살아 있음, 그 확인 정도가 아닐까. 어쩌면 허성임 편에서 장수미를 보았기에 그러했던 것일 수 있다. 어떤 일방적 에너지의 흐름, 그럼에도 그 밀도가 ‘선-공격’은 허성임에 다분히 기운다. 마지막에 홀연 장수미가 떠나고, 다시 돌아오며 돌아서고, 허성임은 장수미에게 아마 ‘You(’re) lost it.’ 한다. 그러나 장수미는 ‘You(/We) are lost wor(l)d.’ 하고, 허성임은 다시 ‘You(/We) are lost two wor(l)ds.’ 한다-‘You’인지 ‘We’였는지 불확실하고, ‘word’인 것 같지만 ‘world’로도 일견 들렸다/두 개의 단어는 ‘mother/father’로, ‘-ther’의 언어유희의 연장이다. 둘은 하나의 단어인지 두 개의 단어인지로 대립한다.

    이것을 풀자면 ‘그것’을 잃어버렸다. 우리는 단어(-세계)를 잃었다. 곧 잃어버린 세계에서 (단어로) 떠돌고 있다. 아니야. 너는/우리는 하나가 아닌 두 개의 단어/세계를 잃어버렸어. 그러니까 언어유희로만 보이는 이 문장들은 네가 잃어버린 ‘그것’은 곧 또 다른 ‘너(자신, 너를 보증하는 무엇)’이면서, 그래서 너를 잃었기에 너는, 나아가 우리는 같은 세계 안에 ‘잃어버림’의 어떤 상태로 있다는 것이다(왜냐하면 나 역시 너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각각의 세계 아닌 세계에서 너라는 세계를 잃어버렸다는 뜻이 된다.

    ‘it-wor(l)d-you’의 등가 교환은 앞서 둘의 세계의 경계를 구성하는 방식들-가령 거리를 둠으로써 하나의 세계를 재현하고, 다시 서로를 마주함으로써 서로에게서 자신(의 바깥)을 보며, 우정의 과잉, 어쩌면 우정의 본질을 세계와 등치시키는 것 속에서 어느 정도 가능한 것(-해석)으로 보인다. 만약 ‘word’가 아닌 ‘world’라면, 장수미가 허성임의 (그것의) 잃어버림을 지적하자 너는 (잃어버린) 같은 세계를 지적한 허성임은 우리는 세계라는 너, 세계라기보다는 너란 세계를 잃어버렸고 지금 이렇게 우리는 우리가 됨으로써 세계를 찾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는 잃어버림의 슬픔이 아니라, 그 반대, 곧 기쁨이다. 그렇다면 둘의 우정의 긴밀한 연대는 어떤 미완의 유토피아적 긍정의 세계를 만들며 (임시) 정착한다. 또는 세계의 거주의 틈을 찾는다. 관객을 배반(背叛)하고, 관객을 ‘관객’으로 재현하고, 관객을 구경꾼으로 만들던, 나아가 관객에게 환영으로 남던 이들의 어떤 과정은 결국 관객을 옆에 두기보다는 곁에 두는 방식으로 그 둘의 틈의 거주 공간을 관객에게 주어준다. 그 바깥 아닌 바깥에서 그들은 진정 어떤 속살을 열어 보인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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