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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세영/이민경 <운동장>, 극장 발생의 기각, 그리고 극장의 계몽
    REVIEW/Dance 2014. 12. 5. 00:12

    움직임에서 움직임 바깥으로


    ▲ [홍은]입주예술가창작발표-모모한 예술 <정세영/이민경-운동장> [출처=운동장 페이스북]

    우선 ‘운동장’이라는 움직임/시간의 실제적 은유의 (작품에 대한 콘셉트에 나오는) 제목-일상으로의 확장이라는, 너른 극장 발생 내지는 춤의 너른 범주, 곧 일상적 현재성을 의도한 것으로 보이는-은 멈춤의 태(怠)만한 업(業)무의 선언(드러냄)과 연대에의 감응의 빈 터전을 만드는 것으로 변용됐음에서 이 공연에 대한 설명을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곧 <운동장>은 달림의 순환적 반복(-강박)의 형벌을 기꺼이 자기 동력으로 껴안는(이 공연에 참여하는 자신들에 대한 성토와 공감의 측면에서) 자본주의의 구조적 동력과 속도로부터의 거리 두기의 측면을 거시적인 차원에서 이상적으로 가져간다는 점에서 구조주의적이자 이데올로기적인 부정적/비판적 알레고리였으며, 실제로는 그 회의로부터 현실의 고삐를 늦추는 작업이 춤을 추고 보는 그 사이의 긴장 대신에, 노는(play) 공간(ground)에서의 ‘제도적 시간’이 흐르는 긴장 안에서 해소됨으로서의 ‘운동장’으로 기능하는 데서 이 공연 같지 않은 공연의 실제적인 ‘운동장’의 수행이 있다. 곧 공간이라기보다는 기반(ground) 속에서 노는(play) 퍼포머로의 관객 재배치가, 춤을 추지 않는 가운데 공연이 이뤄지는 게 그 형식이라면 형식이다. 이른바 이 최소한의 형식은 곧 아무것도 없는 ‘운동장’에 있고, 그 규칙 없음, 모두가 뒤섞인 그 구분 없음에 있다. (물론 이는 서 있는 신체의 훈육 대상을 만드는 사열대가 없는 그런 공간이다.) 


    이것은 새로움이다?!


    결국 이것은 (관객의 입장에서) 새로움이고 (예술의 측면에서) 앞선 형식이라 하는 것, 그래서 이런 공연도 필요할 것이라고 예술의 장을 재설정하기보다 공고히 하는 (첫 번째) 어떤 입장은 사실 이곳이 보여줌과 봄의 이분법적 긴장 대신, 춤추는 (의무와도 같은) 권리를 추지 않아도 되는 권리를 관객에게 양도하고, 이 ‘운동장’에 멀뚱멀뚱 데면데면 선 채 관객 자신도 그렇게 만들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는 소치에서 오는 것처럼 보인다. 곧 이 공연은 무엇을 보여주거나 실험의 양식을 선취/전유하기보다 (수동적) 관객에게 주체의 시간을 과제로 남겨주는 데서 멈추는 셈이다. 그런데 이러한 비非-극장의 ‘축자적 의미의 농당스(Non-Dance라기보다, No, Dance!)’는 그들이 앞서 운동장의 은유를 더 이상 정확한 콘셉트로 구현하는 게 불가능하기보다 의미 없음을 자각하게 된 데서 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상 태업이라 하면, 그것을 축자적으로 이행한다면, 공연 자체를 치르지 않아야 한다. 여기서는 이런 자리 자체를 만들지 않았어야 한다. 곧 고용주에게 가하는 저항이 일종의 공연 형태로 이해돼 관객 입장을 허락하기가지 나아가지 않았어야 한다. 곧 태업을 공연으로 전유하지 않았어야 한다. 그러나 바로 바틀비의 ‘~을 안 하고 싶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가 무조건 하기 싫음의 태만이 아닌 ‘~을 하지’ 않는 것(나아가 이것을 제외한 다른 무엇을 할 것을 기대해 볼 수 있음)이라는 것에 유념한다면, 이는 그 하지 않고(춤을 추지 않고, 퍼포머-주체가 되지 않고), 결과적으로 그 비어버린 부재의 시간에 우리가 채워야 할 말의 자리를 남겨놓았다는 것으로, 사실상 태업이 비非-공연의 공연으로 전유되는 가운데, 실제적인 태업의 가능성을 실행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구태의연하다!?


    ▲ [홍은]입주예술가창작발표-모모한 예술 <정세영/이민경-운동장> [출처=운동장 페이스북]

    ‘관객의 태업’까지 역설적으로 가능하게 함은, 곧 공연자의 공연 중단이라는 사실, 가령 자본주의의 속도 속에서, 자기 계발의 내재적 동력(-진정성이기도 한)으로 치환하는 윤리학(이라는 운동장의 이데올로기적 비유), 그리고 이것이 더 이상 예술계 내부(-특히 미술의 영역으로 확장/비약하면)에서도 새롭지 않음을 문제 제기하는 또 다른 (두 번째) 입장, 나아가 기본 소득 확보에 대한 예술가 연대의 전면 투쟁의 대안 제시의 한 입장은 이 자리가 결국 어떤 속도-강박에 대한 예술가들의 내재적 불응이 사건으로 튀어나오고 있음의 의미를 설명하지는 못한다-하지만 그 멈출 수밖에 없었던, 그럼으로써 시작된 예술가의 말의 자리(춤의 포기와 기각의 자리)는 어디까지나 공연의 틀 안에 가상적인 형국을 띠며 자기 고백보다 거국적 문제제기의 양상을 띤다(이는 다양한 형식으로 이뤄졌는데, 기획자 김해주 씨가 자신의 바쁜 하루를 돌아보며 이 공연에서 선언하기로 했던 바 대신 편지(대독으로 이어지는)를 보낸 것은-그 편지의 내용의 진정성이 감응을 일으키기는 했지만-일종의 유희적 제스처를 섞은 퍼포먼스 차원으로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나는 이제 놀렵니다.”라는 마지막 말까지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곧 이 자리가 라운드테이블이 실은 아니라 곧 합리적 의견 교환과 대변의 자리가 아니라, 퍼포머들의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일종의 오픈-리허설이라는 형식을 설명하지도 못한다. 파업에 연대를 구축하는 듯한 태업과 잉여의 시간들은 실은 그 머묾의 시간 자체에 (무)의미를 의의로 가져갔던 것이다. 무엇을 만들며 동시에 현실과 관객과 이격되는 폐쇄 공간의 작업의 개방이 이 공연 이전에 일주일 정도 개방되어 있으며, 이 태업의 시간은 그들에게 명백한 작업의 전부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를 공연자의 윤리를 망각한 것이라 할 수 있는가, 또는 예술의 어떤 형식/의무를 벗어남으로 인해 그것이 새로운 형식이라거나(-앞선, 첫 번째 입장에서) 문제적(이지 않은-또 다른 앞의 두 번째 입장에서) 공연이라 말할 수 있을까, 결과적으로 태업과 관련된 자기 고백의 시간의 첫 번째 순서는 공연의 형태를 띠기는 했지만 의례적인 공연의 제스처를 드러내면서 그랬다(곧 공연이 되기 전의 사전 순서였으며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는 공연의 우스꽝스런 전초전이었다). 

    무지한 관객을 대하는 예술가의 의무


    이 안에서 무언가를 보기 위해 온 지역 주미의 소외는 예술과 삶의 분리라는 이념형 대신 예술과 삶의 분리를 종용한 문화 제도와 교육의 부분, 고급문화/대중문화의 구분, 관객의 해석학적 모델이 아닌, 기계적 커뮤니케이션 모델의 구분에서 오는 예술에 대한 모더니즘적 인식·자각과 같은 어떤 사회 전반의 더 큰 문제로 나아가는 반면, 그 지점까지를 이 빈 자리에 소환하지 못함(만)이 그들의 소외에 대한 예술(가)의 윤리적-아니 도덕적이지 못한 부분에 대한 비판이 가능할 것이다. 곧 무지한 관객으로 표상된 관객이란 주체의 반복적 갱신까지를 고려에 두지 못했다는 것 정도가 될 것이다. 반면 이전 어떤 입장의 이런 공연의 새로움이 요구된다는 의견은 결국 또 다른 예술가-관객의 커뮤니케이션 모델의 대입(곧 그것을 인식 못 하는 무지와 오만)이다. 결과적으로 이 라운드테이블 형식을 띤-앞서 또 다른 입장, 자기 계발의 윤리학의 비판과 가격, 그리고 이 공연의 메타 비평과 예술 장에서의 순환으로의 편입의 시각으로 인해 더욱 더 그렇게 됐던-이 공연/퍼포먼스는 이어 언급되는 구태의연함의 양상이라기보다는 그 하지 않음의 ‘선택’과 또 다른 함의 주체로의 변용이 너르게 시공간을 형성한, 이 운동장 형식의 윤리적 출발(오히려 공연은 그럼으로써만 비도덕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더 설명하는 것은 중언이 되겠지만 공연의 의미 자체가 사라진 상태에서 공연을 치름 자체가 관객에 대한 기만이기 때문이다. 곧 그것은 단 둘의 차원이 아니다.)에 대한 간과에 가깝다. 무엇보다 공고한 듯 보이는 예술의 형식적·실험적 속도전의 동력이 다했음의 징후를 보여주는 미래적 원환의 시작으로 당도하고 있던 순간이기 때문이다. 결국 처음부터 이 공연을 그 아방가르드적 단절의 질서를 알고도 속아준 것인지 잘 모른 채 예술가의 자율성에 대한 무조건적인 존중에서인지 모르지만 홍은예술센터의 직원 분도 있었고 고용주의 입장에서 12시 사업장 폐쇄를 선언했기 때문에, 처음 언급한 ‘제도적 시간’의 긴장 아래, 이 공연을 메타적으로 감식하는 앞선 두 화자의 입장이 존재했던 부분도 어느 정도 있었다. 아무튼 이 공연의 현재와 사건으로서의 시간을 역사의 일부(예술 장의 한 예로)로 처리할 수 있었던 것 역시 크게 보면 이곳이 운동장이었기 때문이다. 
     
    춤의 속도를 늦출 순 없는가?

    이 너무 편해 도리어 불편하거나, 관객을 관객으로 존중하지 않는 듯한 (그럼으로써 관객에 대한 개념을 재상기하게 하는) 공연/퍼포먼스는 관객과의 연관을 두고 보면, 공연자의 전례 없는 태만함으로보다는, 극장(어둠)의 계몽의 한 부분으로 기록될 수 있을 것 같다. 조금 더 나아간다면 댄싱 나인과 같은 더 잘 추기 위한, 더 멋있어 보이기 위한 춤의 원환적 동력과 미적 도취에 대한 춤의 편취와 함께 열광하는 관객 개발이 마치 무용을 밝은 빛으로 이끄는 것 같은 현실을 무용가 스스로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것 같은 상황에서 차라리 하지 않음, 이상의 대안이 있을까. 한편 고용주, 곧 제도와의 관련 아래 이 공연을 본다면 제도에의 누적된 피로를 작업의 동력으로 갱신하며, 곧 제도 비판과 함께 제도에 불화하며 제도와 같이 살아남는 하나의 예가 성립한 것 아닐까. 마지막으로 예술가의 장 속에서 이 공연을 본다면 역시나 관객을 기만한 전례 없는 예술가의 자율성의 구가에 불과할 뿐이라거나 아님 긍정적/현실적 차원에서 연대를 부르는 시작의 의미가 될 수 있을까, 물론 이 공연을 극장 발생보다는 담론 발생의 어떤 공연으로 보는 한. 하지만 이는 앞선 누군가의 입장에서의 예술가의 사회인으로서의 사회적·정치적 투쟁의 형태보다는 운동장의 노는 공간의 유희로써 벌어지는 것이 더 맞는 것일까에 대한 물음은 이 공연을 관통해야 하는 마지막 질문이다. 곧 그 텅 빈 모두의 운동장에서 모두는 우리라는 주체를 형성할 수는 있지만 반면 그 안에서 모두가 자유롭기만 하는 것 역시 가능하므로.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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