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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순호 <유도>: '구상되는 이미지, 편집되는 순간의 파노라마'
    REVIEW/Dance 2014. 6. 4. 02:46


    ▲ 박순호의 <유도> [사진 제공=LIG아트홀] (이하 상동)


    박순호의 <유도>는 유도를 재현한다기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도의 순간들을 떠올리게 하는 데 더 가깝다. 이는 그 이미지의 (머릿속) 맺힘이자 어떤 구상이다. 손을 앞으로 뻗고 메치기 직전 내지는 매침을 하기 전의 포즈는 정적과 맞물려 있다. 이것이 어디서 시작되고 또 순식간에 끝이 날지 모른다. 그 긴장의 무한한 연장은 곧 정적을 지정한다. 곧 이 시작의 지점을 모르기에 그 급작스러움(의 끝)은 긴 여운으로 빚어진다. 어떤 파동으로 물결친다. 


    그런데 이 여러 군상의 매치거나 매침을 당하는 어떤 두 가지 패턴적 전형의 존재들을 체현하는, 개성 없는 존재자들은 무대를 마치 유령처럼 떠돈다. 그리고 그 손이 어느 순간 거대한 힘의 촉수가 되어 타인의 몸 전체를 빨아들이듯 낚아 채 내동댕이친다. 파편화된 시선들이 차원을 달리해 위치해 있고 그것이 어떤 순간에 맞물려 균열을 빚어내는 효과를 만드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 움직임들은 정확히 유도의 결정적 장면들을 ‘재현’한다. 



    이는 물론 유도 경기를 실제 펼친다고 무대에서 그렇게 비춰질 수 있다거나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따분함을 넘어선 어떤 효과를 창출할 수 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에 비추어 생각되어야 한다. 


    어쨌거나 이 재현의 형태는 춤인가. 앞서 말한 것처럼 사람들은 눈을 마주치지 않음으로써 그리고 그 넘어가는 순간 단지 하나의 덩어리가 될 뿐이라는 점에서 마주침이 아닌(나아가 그것이 전제하는 윤리적 측면까지 배제한 채) 단지 넘어감과 넘어가지 않음의 순간 그 감각만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방에 널린 너른 눈들의, 사실상 감은 눈의, 그래서 부재하는 눈들의, 아니 다시 관객에게 있어 사방에 널린 시선들의 분산과 그 종합은 공간 전체에 다른 눈들을 심어 놓으며 어떤 입체적 차원의 공간을 빚음으로써 이 무대 전체를 쓴다. 어둠의 공간을 환유케 한다. 어떤 정적(의 분산된 공간들)만이 있다가 찰나적 (빛의, 조명의) 타격, 충격의 순간만이 있는 것이다. 이건 그러니 공간의 입체적 조형이자 안무이다. 어떤 오브제로서의 몸들, 하지만 머릿속에 맺히는 동시에 전해져 오는 어떤 충격의 감각들은 생생하다. 이건 하나의 이미지만이 아니다. 



    이런 찰나적 움직임, 연속되지 않는 움직임들의 파편들은 시차적 구문을 만드는 음향의 주고받음 내지는 파동의 형태로 전이된다. 일종의 기합을 넣는 형태로, 이는 확장된다. 하나의 몸에서 비롯된 소리는, 무대 바깥에서 이어지면서 현존하는 신체를 이화시킨다. 앞서 타격점이 무용수에게서 (이를테면 고통과 아픔으로) 체현되기보다 마치 사운드의 파장으로 구분되고 무대 전체로 확장되어 갔던 것처럼(이는 무용수 스스로가 사물처럼 놓이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기합은 그 신체에 한정되지 않는다. 


    한 명의 무용수를 품어 올리고 여럿이서 이동하며 매트를 치우는 행위는 또 무엇을 표현하는 것인가. 마치 시선들, 육체들이 떠도는 무대, 시간의 흐름이 분절되어 급작스레 찾아오는 사건의 순간들이 퍼져 있는 무대는, 또한 사라지는 시각과 청각의 잔향 효과의 시차는 일종의 공감각적인 하나의 장을 만들게 된다. 유의할 점은 관계는, 가령 처음부터 둘의 현존에서 비롯된다기보다 하나의 스파크를 지정하기 위해 유도의 규칙과 실행이 전제된 채 기능하는 것에 가깝다는 점이다. 또한 피드백이 뒤늦게 이뤄지기도 하는데, 이는 시간의 편집을 가능케 하는 카메라 시점에 의한 편집이 적용되고 있음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현존은 편집에 의해 무대로 연장된 신체들의 시차적 몸짓들의 구문으로 새롭게 인지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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