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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이비> 리뷰: '눈 먼 현재의 삶에 비수를 꽂는'
    카테고리 없음 2013. 11. 7. 17:04

    우리에게 구원은 없다는 것에 대한 불편한 그리고 진정한 믿음으로부터




    ▲ <사이비> 포스터(연상호 감독)ⓒ NEW


    수몰 예정 지구에 위치한 동네, 보상금을 받고 곧 떠나게 될 주민들을 겨냥한 가짜 목사 최경석(권해효)이 임시 교회를 만들어 순진한 그들을 홀린다. 이 혹세무민의 이상한 기류 속에, 시종일관 욕지거리를 달고 등장해 불편하게 현장을 헤집는 술주정뱅이 김민철(양익준). 그리고 진정성 어린 신앙으로 동네 사람들을 위로하려는 유약한 초빙 목사 성철우(오정세)가 맞선다.

     

    "충실성의 종교적인 이름"(장 뤽 낭시)인 라틴어 피데스(fides)는 프랑스어 믿음/신앙(foi)의 어원이며, 이는 신뢰(confiance=confidence)를 의미한다. 곧 믿음(신앙)은 누군가(신)에 대한 믿음이며, 그 상대방에 대한 충실함을 다하는 것이다.

     

    <사이비>에서의 '믿음'은 누구에게나 제약 없는 신의 언어, 곧 성경 안의 '말씀'으로부터가 아닌, 신의 특별한 사도로서 이들에게 믿음을 전수하는 특정한 교회 집단으로부터, 단지 이들에게만 직접적으로 건네진다는 것에서 문제를 안고 있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은 제한된 천국의 영역에 들어갈 한 사람으로 추대되며, 그 영원한 은총에 보답하기 위해 자신의 하잘것없는 재산을 헌금으로 모두 바치고자 한다. 곧 이들은 신을, 그리고 천국의 선택된 영역에 들어갈 사람임을 믿으며, 그 믿음을 위해 돈으로써 충실함을 다한다.

     

    이 구원에 대한 약속은, 빠르게 돌아가는 도시 문명의 수혜를 보지 못한 채 근근이 살아가다 이제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고향에서 추방당한 마을 사람들에게서, 그들의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환경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인계하며,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임을 그들이 그제야 깨닫게끔 한다.

     

    수몰 지구, 곧 터전으로부터 떠나는 동시에 그곳이 사라진다는 것은 최근 많이 등장하는, 여러 '파국(catastrophe)의 지형'의 이야기와 닮아 있다. 인류의 삶의 현재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리며 불확실한 미래에 직면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출현하는 '가짜-믿음'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곳(nowhere)'인 유토피아의 이미지를 생산하는데, 이는 실제적인 삶에 대한 것을 담보하지 않으며 이곳 너머 다른 세계에 대한 추상적이고 형체 없는 믿음으로 도약하고 만다.

     

    신의 사도의 달콤한 말들에 혼을 빼앗긴 순진한 사람들은 일견 근대 문명 이전의 전근대적 사람들의 믿음 체계가 가진,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인 측면과 연결되는 듯하다. 적어도 우리는 저렇게 순진한 믿음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최고의 것으로 여겨지는 돈을 대가(?)없이 갖다 바치지는 않을 거야라는 '믿음'을, 스스로에 대한 '신뢰'로써 가져갈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러한 믿음을 거짓 신화를 생성하는 '이데올로기'와 함께 들뢰즈가 언급한 '국가장치'(사회를 안정화시키고자 하는 중심 체계에서의 유무형의 전략)를 연결 짓는다면, 세상은 온통 거짓들로 점철되어 있으며, 여기로부터 벗어나기는 불가능에 가깝고, 이는 사회를 안정화시키고, 사람들이 그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선인 보이지 않는 지배 전략에 의한 것임을 사유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파국에 닥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내재적인 구원의 목소리는 '(다른 것 필요 없이 그저) 열심히(성심껏) 일하면 잘 살 수 있습니다'라는 국가의 부름 내지 '(일단) 소비하십시오, 그럼 행복해질 거예요.'라는 광고 등에서 유사하게 반복되는 자본의 슬로건과 흡사하다.

     

    나아가 나는 어른이고 너는 '아프고 흔들려야'만 어른이 될 수 있다는, 곧 '성숙한 어른'과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아이'를 대별시키는 수많은 청춘(-팔이) 담론에도, 또한 현상을 점검하기보다 그로부터 그저 빠져나오라는 '힐링하세요!'라는 힐링(-팔이) 방송 프로그램들에서도 거짓 믿음과 구원의 논리는 여지없이 적용된다.

     

    그러니까 구원의 담론을 사회 거시적인 장치와 제도 마련, 현안에 대한 비판적인 고찰에는 눈 먼 채, 한 사람 한 사람의 그저 어느 정도 잘 먹고 사는 개인적 차원의 안위에 두는, 달콤함에 눈멂을 만드는, 미시적 해결에 치우친 수많은 담론들에 우리는 정녕 눈이 멀지 않았는가의 질문을 자신에게 돌린다면, 영화 속 저들의 순진한 믿음을 진정 우리는 비판할 수 있는가.

     

    영화의 래디컬(radical)한 부분은 이것이 사이비 교회의 재현과 그에 대한 놀라움과 비판을 끌어내는 데 있지 않으며, 바로 이런 파국과 구원의 정교한 변증법이 오늘에도 유효하며 똑같이 적용되고 있음을 직시하는 데 있다.

     

    영화의 슬로건, "당신이 믿는 것은 진짜입니까"의 질문은 "당신이 믿는 것은 가짜가 아닙니까?"라는 질문의 뒷면이다. 이는 '민철'을 경유해, 이 세상이 가짜로 판치며 모두가 가짜를 진짜로 믿을 때, 당신은 진짜를 진짜로 말할 수 있는가의 용기가 있느냐, 그 진짜를 실천할 수 있느냐의 질문으로 환원된다. 이 질문은 무지를 분별하는 지식 차원에 그치지 않으며, 그 무지함에 대한 비판의 실천의 과제를 노정하고 있다.

     

    민철은 오직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뜻하는 '여실지견(如實知見)'의 믿음 외에는 또 다른 믿음이 없다. 철저하게 민철은 무신론자이며 파국을 맞은 사람들이 달콤한 미래를 쉽게 믿어 버리는 것에 비해 어떤 동요도 겪지 않는다. 이 한결같은 민철의 무-믿음적 믿음에 대한 관객의 믿음은 결말의 어떤 크나큰 반전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러한 반전의 요소는 연상호 감독의 전작 <돼지의 왕>에서도 마찬가지로 감독이 감행했던 바이며, 계속 놀람과 움츠림 속에 볼 수밖에 없는 끔찍한 현실 속에 던져지는 또 다른 충격에 다름 아니다.

     

    애니메이션이 어찌 이다지도 크게 몰입과 충격을 가능케 하는지에 대한 답은 이 영화 자체가 갖고 있는 질문의 예리함과 충격적인 장면들을 병치시키는 전개 방식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이는 배우들의 사전 녹음 방식의 영화 촬영 과정을 통해 캐릭터들의 단단하고 풍부한 현존을 만드는 목소리들이, 이미지 이전에 주어졌다는 것과도 상응된다. 이 사전 녹음 방식은 예컨대, 온전한 낭독이 가능함을 의미하고, 여기에 표정과 대사(발화)와 입모양의 동기화, 또한 배우의 모습이 애니메이션에 자연스레 포개어지는 효과를 낳기 때문이다.

     

    감독은 민철과 마을 사람들의 구도를 통해, 진실을 아는 이의 누구보다 불행한 삶과 눈멂으로서의 수많은 구원을 대비시킨다. 이는 구원에 대한 어떤 믿음도 제시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 구원 없는, 예컨대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서 주어지는 달콤한 미래 없는 현실들의 끈덕진 진행에서 무엇보다 '불편한 몰입'의 결과는 당연한 것일 것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희망 담론에 무작정 믿음의 무게를 싣기보다는 그 무분별한 희망과 미래에 대한 약속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아닐까. 믿음의 전제들을 점검하고, 이 넘치는 믿음의 주어짐이 진정한 의미에서 어떤 구원도 약속하지 않음을 인식하는 것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사이비>는 꽤 통렬하게 현재를 사유하고 비판하며 진정 '헛된 구원' 너머의 구원에 대한 시작을 정초하는, 구원이 등장하지 않지만, 역설적인 의미에서 지극히 구원을 이야기하는 영화라 하겠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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