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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소'의 전유,《근성과 협동(GUTS AND COOPERATION)》
    REVIEW/Visual arts 2013. 9. 29. 04:55



    ▲ 홍은주, 김형재, <근성과 협동>, 2013. 옵셋 프린트, 15 x 21 cm. 엽서 이미지.


    오래된/허름한 역사적/시차적 환경, 번쩍거리는 조명들의 오브제들을 지나, ‘좁고 높은 유격’의 콘트리트 계단을 밟아 스튜디오에 입성하면, 책들로 둘러싸인, 컴퓨터 환경의 사무실임을 깨닫게 된다. 전시는 이 ‘스튜디오’의 일시적인 전유로서, 김실비의 작업은 이 ‘홍은주 김형재 스튜디오’ 안에 하나의 모니터 안 뮤직비디오 형식의 영상으로 소환된다. 이는 중앙에 있으며, 우리가 컴퓨터 앞에 앉을 때 하나의 내밀한 개인적 공간의 장을 곧장 형성하듯 좁은 공간의 낯섦, (가령 오프닝의 들락날락하는 열린 분위기가 아닌 이상) 평상시 작업하고 있을 스튜디오 주인들과 데면데면한 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는 이 공간이 갖는 분위기, 속에서 김실비 작업은 비교적 안전한 환영으로 가는 출구가 된다. 곧 집중할 수 있는 공간으로 간다는 것. 다시 말해 스크린 너머의 세계를 지평으로서의 스크린이라는 표면을 인지하지 않은 채 빠져들 수 있다는 것.

     

    다시 장소의 (순수한) 전유의 문제로 돌아오면, 이 공간의 경험은 매우 어색하게 전시의 일부가 똬리를 틀고, 차이의 감각으로 전시 용도가 아니었던 물품들과 이제 전시가 된 그 오브제들의 분별 의식을 둔 채 이제 그 속의 공간을 점유한 전시들의 차이를 분별해 내게 된다. 이는 삶이 곧 전시가 되고, 전시가 삶의 확장이라는 식의 두루뭉술한 미학 안에 포섭되지 않는 그 무엇들만이 감각으로 남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수많은 책들은 그 자체로 관심의 대상이 된다. 이는 끼어든 전시가 구성할 수 없는 원래의 영역이지만, 다시 의도된 것을 넘어 확장된 전시의 일부가 된다. 아니 예기치 못한 차원에서의 의도를 구현하게 된다. 바로 전면에 드러나는 커다란 책장은 디자이너의 참조 서적이자 관심 리스트로서 책들이며(그래서 시리즈나 한 권씩 꼽혀 있다), 디자이너 책상 뒤편은 주로 그들이 디자인한 책들이다(그래서 여러 권씩 꼽혀 있다). 


    그 중에서 구별되는 전시의 영역은 책상 위에 놓인 각종 포스터가 종이 규격인 A/B 시리즈 규격의 두 부분으로 나뉘어 유리와 나무로 된 함에 담겨 차곡차곡 쌓여 있는 부분(<인쇄물보관상자>)이다. 이는 만질 수 없게 차단되어 전시 요소로 환원되며, 유형학적 아카이브의 형태를 띠는 동시에 그것을 계약 관계에서 사용하고자 할 때 권리자와 모종의 의사소통 과정에서 비로소 만질 수 있는 차원으로 열린다는 점에서 의미는 열려 있지만, 완성되지 않는 형태로 잠재해 있다. 이는 어떤 표본이며 예시이고, 그 보이기에는 투명하지만 실은 디자인 차원에서는 불투명한 차원인, 곧 계약 이전의 단계로서 존재하며 일단은 사용 불가능한 디자인/사용되어질 디자인들은 그 제일 위에 놓인 계약서에 따라 유동 가능한 의미 지형을 형성하고 있다. 


    ▲ 니콜라스 펠처, <묵인된 질량>, 2013. 책 100권, 각 22,5 x 15 x 3,5 cm. 작업 이미지.


    한편, 중앙 책장 속에서 구별되는 요소가 하나 있는데, 가령 한 권씩 꼽힌 책들이 아닌 아래쪽 한 줄로 쭉 깔린 책들이 그것이다. 스튜디오에서 (질량이 나가지 않는) 빈 프린터의 포장 상자를 찍은 동일한 흑백 컷들로 채워진 책(《묵인된 질량》), 곧 스튜디오에 대한 자기-지시적인 의미와 함께 하나의 이미지로 소급되는데, 이 소급으로서의 반복은 동시에 확장이며 비어 있지 않음의 질량으로 늘어난다. 이는 책장을 넘기면서 표지와 같은 이미지 너머의 것을 가리키지 않음을 인지하게 된 이후에 얻어지는 결론으로, 책은 그 내용과 의미를 단지 표지로, 그리고 표지의 (부재를) 담고 있는 용기로 돌림으로써 어떤 의미에 대한 해석도 불가능하게 만든다. 오로지 책은 물질로서만, 텅 빈 기표로서만 존재하게끔 되는 것이다. 사실상 자기-지시적인 차원은 빈 프린터 상자에 대한 시뮬라크르로서의 인지가 없더라도, 이미 하나의 이미지를 자기-복제하며 실은 어떤 하나의 이미지로도 소급될 수 없음을 말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자기-지시적이면서 또 그것의 불가능성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 김실비, <다들 그녀 탓을 하지>, 2013. 단채널 HD, 색, 무음, 3'04, 가변 크기. 영상 스틸. 


    김실비의 작업은 시차적인 연접의 작업이 10월 초 다른 공간에서 열릴 예정이라 약간은 미지수인 상태인데, <다들 그녀 탓을 하지>는 《금지곡들: 여자란 다 그래》 연작의 제3장에 해당한다. 소리를 지운 상태에서 이미지들이 흘러가고, 이는 마치 이 스튜디오를 점유할 수 없는 상태, 마치 헤드폰을 끼고 그것을 보는 나를 바깥에서 바라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가상적으로 전유하는 듯한 감각을 준다. 어떤 것도 재현의 측면을 벗어나고 있다 보이는데, 돈 알폰소라는 배우는 이 동네 아저씨쯤으로 보이고, 끊임없이 말을 뱉어내지만, 노래로 처리되며, 실상 들리지 않는 목소리는 흘러가는 노래방 가사들로 음악적인 공명을 상상하게끔 만든다. 클라이맥스의 쾌감을 전하며 망치로 때림으로 인해 튀어나오는 리듬으로서, “망각-현시”/“눈멂-지켜봄”의 두 대립 (자막)쌍은 그 둘을 오가며 어떤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놀이를 끊임없이 벌이고 있는, 이 이상한 뮤직비디오의 ‘자연스러운 과잉’의 형태와 상응한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내용인지는 하나도 모르겠다. 다만 10월 초 작업을 보고 그 알레고리를 이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장소의 전유’의 측면은 김실비 작가의 경우, 이곳 지역을 배경으로 담은 뮤직비디오의 장소적 맥락의 (재)전유를 사무실이라는 환경에서 그 장소의 일부가 되는 신체의 관람 환경을 배치한다는 점에서, 이은우 작가는 디자이너 사무실이라는 공간 정체성에 맞춰 ‘디자인된 종이’들을 그 속에 배치하며 임시 계약의 잠재적 영토를 만들어 사무실 안에 또 다른 가상의 계약 과정(공간)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니콜라스 펠처 작가는 이 사무실의 한 부분으로 출발해, 그것으로 소급될 수 없는 이미지들의 순수 무게로의 변환을 통해, 각각 사무실이라는 장소를 끌어들여 재영토화/탈영토화하는 ‘장소의 전유’를 실천한다.  



    [전시 정보]

    «근성과 협동»: 김실비, 이은우, 니콜라스 펠처 3인전


    전시일시: 2013_0927 ▶ 2013_1019 / 일요일 월요일 휴무/ 관람시간 12:00-07:00pm / 일요일 월요일 휴무

    전시장소: 홍은주 김형재 스튜디오_서울시 중구 을지로 2 101-27, 동진빌딩 303, 100-845 (을지로3가역 1번출구)

     

    [작가 홈페이지]

    eunulee.com

    keruluke.com

    nicolaspelzer.net

    sylbeekim.net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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