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준 2013.09.25 12:34


▲ 서울프린지페스티벌2013 포스터


올해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이하 프린지)의 참가 장르는 연극이 절반가량을 차지한다. 실내 작품이 삼분의 이 이상을 차지한다. 몇 년 사이에 프린지는 극장이라는 공간과 연극을 비롯한 환영‧현존‧재현 등의 범주와 관련을 맺는 공연예술로 초점이 옮겨 갔다 보인다. 여기에서 눈에 띄는 바는 막연히 홍대를 상징하는 음악과 야외 공연이 프린지를 구성하고 있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티스트의 참여에 제한을 두지 않는, ‘심사를 표방하지 않는’ 프린지의 아이덴티티가 모든 장르를 포함한다기보다는 공연예술 축제로서의 비중이 커진다는 것, 그리고 홍대를 거점으로 작업하는 대부분의 (음악‧미술) 예술가를 포함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은, 암묵적으로 참여 아티스트에 대한 장르에 대한 포커스가 달라졌음을 추측케 하는 한편, 조금은 독특한 현상으로 읽히기도 한다. 여기서 암묵적이라는 것은 축제의 언표화된 측면은 아니지만 분명 기능하고 있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조금 나이브하게 압축하자면, 9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음악 공간 곧 작업 공간과 문화적인 측면의 소비 공간이 순기능을 하던 시기가 상업적인 공간의 변모에 조금씩 동시에 급격하게 무력해지게 되었다손 치더라도, 늘 몇몇 클럽에는 공연이 있고 일정 정도의 마니아층이 있을 것이다. 취향적으로는 스노비즘에 가깝든지 대규모 자본의 문화 다양성의 전유적인 측면에서 그것을 포섭하는 것이든지 어쨌거나 소위 잘 나가는 인디밴드의 음악으로 그것들이 일부 소구되는 가운데 홍대 ‘상상마당’의 개관과 여러 인디밴드들의 공연이 그 안에서 소비의 측면에서 디자인되며 표상되는 가운데(그전의, 그리고 지금 역시도-클럽에서 일어나는 공연들의 정보는 소수의 공동체적 문화 내에서만 전달되는 것에 가깝다) 프린지의 홍대 인디밴드들에 대한 매개의 기능은 실제적으로 그 매력을 잃었거나 그 효력을 상실했다고 보인다. 곧 프린지의 기간 안에, 늘 일어나고 있던 밴드들의 음악을 다시 옮김에 불과하거나 대중문화의 일부로 들어오게 되거나 더 좋은 음악 공연의 장소에서 세련된 프로그램 안에서 표상되거나 하는 여러 차원의 문제들이 그에 결부되어 있다. 어떻게 보면 프린지의 특성을 이런 장르적인 것의 비중, 그리고 장르마다의 각기 다른 관점에서 바라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그 ‘제한 없는’ 아티스트라는 범주는 모든 것을 포함하지만 실은 모든 것을 포함하지 않는 ‘은폐된 총체’로 자리하는 듯하다.


 개인적으로 몇 년 전에 프린지를 볼 때는 음악 공연에 매력을 더 느꼈다. 연극이야 대학로에서 너무나도 많이 반복되는 것이었으므로, 동시에 그들은 대학로에서 연극을 생산하고 있었으므로 생산지에서의 소비를 할 수 있었던 셈이므로 이를테면 산지직송에 가깝다.


 홍대의 많은 밴드들이 페스티벌이라는 양지로 나오며 펑크‧록 등 장르의 구분 아래 일종의 ‘임시 연합’을 이룸은 연대적인 측면에서는 뜨거웠던 한편 프로그램적으로는 미약하고 또 헐거울 수밖에 없었다. 밴드들은 이 페스티벌의 현장감을 전달하는 멘트로 느슨하게 페스티벌에 접속했다. 가령 “이 페스티벌에서 공연을 하게 되어 기쁘네요.” 정도, 늘 관객은 익숙하고도 새로운 것이었기에, 현장 역시 그런 것이기에 이들의 멘트는 한편 이 축제를 가리키면서도 당연히 이 축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기도 했다. 그러니 페스티벌과의 접속은 느슨할 수밖에, 동시에 이들은 축제를 표상하거나 축제 안에 동화된다기보다는 그저 자신의 개성을 온전히 보존하는 것에 가깝다. 곧 어떤 축제의 기획이라는 측면이 접합점을 찾기 어려운 것이다.


 반면 다양한 ‘무대예술’(음악 공연을 제한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을 일단 이해해 주길 바란다. 무대예술인, 곧 공연예술에서 앞서 세 가지 특성을 든 것은 음악 역시도 공연예술인지라 또한 무대를 활용하는 예술인지라 용어상으로는 구분이 모호했기 때문이다)은 대학로에서는 공연을 올리기 힘든 젊은 아티스트들, 그리고 원작의 재현, 더 정확히는 원작의 진지하고 무거운 그래야 예술성을 갖춘 것으로 용인되는 어떤 분위기에서의 재현에서 자유롭다는 느낌을 준다는 점에서 특이했는데, 이는 어느 순간 두산아트센터의 기획과 교차되며 프린지 빅보이라는 조금 더 가능성 있는 작품을 발굴하는 단계와 맞물리게 됐다. 이는 두산아트센터라는 주체에 더 방점이 찍히는 것 같지만 실은 프린지 역시 그에 동참한 것이므로 프린지의 무대예술에 대한 비중을 둔 기획의 시도로도 읽힌다.


 이 정도로 말할 수 있을까. ‘프린지는 아티스트의 제한을 두지 않는 반면, 프린지에 접속하고자 하는 아티스트들 중에 그 자체로 자유롭고 발랄하며 (그 태도가) 젊고 신선한 어떤 아티스트의 접속을 기획하며 이 자체를 하나의 축제 아이덴티티로 가져가고자 한다’는 정도, 어쨌거나 프린지 빅보이의 사례는 분명 프린지에 대한 무매개적인 접속의 욕망이 아닌, 프린지가 접속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프린지의 욕망이 조금 더 가시화된 어떤 눈에 띄는 지점이 아닐까. 


단순히 대관료가 싸기 때문에, 별 구속과 (심사 내지 평가의) 제한이 없기에, 일종의 경력을 쌓기 위해, 홍대라는 특수한 장소성 안에서 관객을 만나기 위해 등 많은 이유들을 산출할 수도 있겠지만 왜 무대예술일까에 대한 질문은 그에 우선한다. 아니면 음악의 신선한 포맷과 기획, 또 다른 접속 (욕구)을 창출할 수는 없는 것일까. 또는 음악과 마찬가지로 전시에 있어서도.


작년 프린지에서는 음악의 비중이 줄어가는 가운데 야외 음악 공연의 번외 경기가 벌어졌다. 전시벽에서 열린 ‘오픈스테이지’라는 프로그램, 그리고 올해 야외 전시의 영역은 상당히 축소된 것 같다(실내 전시가 있지만 야외는 정말 부재하는 것 같다). 모든 아티스트에 대한 제한 없는 참여라는 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비중을 장르별로 분배하는 딱딱한 규정보다는 각 장르나 모든 예술에 대한 적절한 참가의 가이드와 어떤 식으로 그것을 축제 안에서 구현할 수 있을지에 대한 설명이 사전에 전달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다시 돌아오면 연극이라는 장르의 참여 비중이 커진 것은 예술의 지형 변화로 해석하기 이전에 프린지의 포커싱의 변화로 해석할 수 있거나 상이한 영역들에 대한 다차원적 가이드의 부재와 연동해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프린지가 제한 없는 참여를 고수하며 또한 ‘포기’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프린지가 어떤 장르적 정체성을 갖고 가지 않기를 바라며 또한 모든 것에 초점을 두다 모든 것을 놓치게 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아무래도 재현에 무게가 실린 연극들이 어두운 극장 내에서 소리 없이 한두 번 공연되고 급하게 사라지게 되는 것이 절반을 차지한다는 것을 바라지도 않는다. 결코 연극에 대한 부정은 아니다.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개막식을 대신해 아니 그것을 포함해 치러진 공연들, <철 지난 바캉스 : 밤샘프린지>는 또 하나의 페스티벌이고 또 하나의 (전형적인 홍대 바깥의) 프린지였고 또한 동네 축제이자 음악 페스티벌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이는 앞서 클럽에서 일어지던 공연 형태를 축제 기간에 다시 하는 형태와는 상이한, 동시에 홍대의 어떤 음악적 욕구를 그야말로 외부로 터뜨리는 어떤 시간이라는 점에서 의미 있게 다가왔다.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선호하는 라인업이 아니라 길게 참여하지는 못했다. 어쩌면 이 완벽하게 지역성을 띤 이 축제에 이방인이라는 것을 혼자만이 느낀 측면도 있다. 아무튼 이는 프린지 자체에서는 어떤 사건으로 불릴만한 무엇임에 틀림없었다. 일종의 홍대 바깥의 외부에서의 자생력을 갖춘 스펙터클 야간 음악 축제(음악만이 다는 아니었지만)를 새롭게 낳은 것이라는 점에서, 또한 대중없는 라인업은 제한 없는 참가 형식으로서 프린지의 정체성에 상응했다.


 두서없이, 짧은 생각들이 예상 외로 조금 길어진 가운데, 요약하자면 음악에서 특히 연극으로의 포커싱의 변화는 ‘제한 없음’에 앞서 무위로서의 실은 유위의 기획을 통해 제한 없음의 가이드와 실질적인 조건을 만드는 하나의 큰 기획 아래 재고해볼 측면이 있다는 정도.


프린지 빅보이라는 형식만으로는 프린지가 재발굴하고 동반 성장해 나갈 유의미한 공연까지는 표상할 수 없다. 지지난 프린지에서 시도된 공연의 결을 살리는 공간 찾기, 공간으로부터의 공연의 출발이라는 기획은 프린지가 열리는 홍대라는 지역성을 가져가면서 프린지와 아티스트의 상호접속이 가능했다는 점에서 단순히 제한 없음의 조건 이후에서 더 나아간 기획이었다는 생각이다. 곧 제한 없는 참가 이전에 여러 차등적 기획과 배치의 측면을 전제해 그 참가의 의미들을 더 확대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김민관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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