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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 편의 작품으로 본 '서울국제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
    카테고리 없음 2013. 8. 31. 13:38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 포스터ⓒ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





    13세부터 18세까지를 청소년으로 규정하는 사전적 정의에 따른다면, 사실 영화에 있어 19세 미만 불가라는 분류는 영화를 제한 없이 보는 단 하나의 마지노선이기에, 그 이외에 모든 영화가 상영될 수 있는 하나의 물리적 영역에 불과하다. 


    서울국제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를 보며 ‘나는 청소년에 해당되지 않아’, ‘청소년의 시각을 반영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우습지’라는 잠재해 있던 선입관은 단박에 깨지게 됐다. 성북동 언덕에 위치한 아리랑시네미디어센터에는 단지 분홍 물결의 자원봉사자들을 비롯해, 영화관 안 청소년 연령의 관람객이 많았을 뿐, 관람한 네 편의 영화는 모두 진지했고 심오하기까지 했다.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가 갖는 청소년들을 위한 그래서 의미 있는 영화제는, 그 이름으로 인해 성인은 이 영화들을 볼 단계를 지났다는 식의 끝없는 오해를 부를 딜레마를 안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영화들을 본다면 필자와 같은 생각이 들 것이다.


    개막작 <메이지가 알고 있었던 일>: ‘아이의 시선’으로 본 어른의 현실


    아이는 물론 어리다. 하지만 그의 시각으로 본 세상은 우리(성인)가 갖는 시각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다시 환기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나아가 그 어림 역시 우리가 어린이를 상투적으로 대하는 방식에서 연유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카메라는 이 아이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비교적 투명한 매체로 작용하는데, 메이지(오나타 에이프릴)는 엄마 록 스타 수잔나(줄리앤 무어 분)와 미술품 중개인인 아빠 빌(스티브 쿠건 분)이 자신을 두고 벌이는 양육권 분쟁에서 이 집 저 집 계속 옮겨 다니게 된다. 메이지의 보모였던 마고(사만다 벅 분)와 바텐더 링컨(알렉산더 스카스가드 분)은 각각 메이지의 아빠와 엄마의 새 배우자가 되며 메이지에게는 두 분할된 가족이 생겨난다. 이 혼란스럽고 복잡다단한 불안정한 삶의 주인공 메이지는 한결같이 의연하며 엄마에게 또 아빠에게 그리고 그 둘의 새 배우자들에게 구김 없이 대하고 사랑스럽게 안긴다. 


    메이지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일까. 제목과 같이 이 모든 상황은 메이지가 알고 있었던 또는 알았던 모든 일이며, 그 불유쾌한 상황들이 메이지의 삶을 들쑤시며 생기는 생채기, 그리고 대책 없이 이기적인 부모의 행동들은 메이지를 거쳐 우리가 직접적으로 알게 되는 사실들이다. 메이지의 시각과 경험을 통과하는 이 현실은 단지 메이지만이 알고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우리는 이 어른과 어린이의 단절된 시각 차이에, 우리의 무지함에 무방비로 놓이며 안타까움을 갖게 된다. 다만 메이지의 시각을 통해 그 사실들을 함께 공유한다. 영화 밖의 모든 이가 그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변화하는 상황들에 메이지의 ‘상처 받지 않은 듯 살아가기’, 이는 그가 몰랐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는 한편 그가 가진 삶에 대한 긍정의 자세와 세상을 사는 하나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기에 중요하다. 하지만 결국 부모가 이혼을 맞게 된, 바로 그 처음부터 그들이 가진 ‘결함’에 의해 결국 각자의 삶으로 떠나는 것을 지켜보며 메이지가 홀로 흘리는 눈물은 애잔하다. 메이지가 계속 의연했으면 하는 마음과 함께.


    메이지의 의연함과 함께 영화는 우스꽝스러운 어른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종일관 유쾌하게 펼쳐진다. 늘 상처를 주고 또 받는 각박한 현실에서 아이들은 상처 받고 또 상처 받지 않은 듯 어른들에게 순수한 모습으로 비치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마음이 편치 않다. ‘메이지가 알고 있었던 일’은 역으로 새삼 우리가 알지 못했던 우리의 모습인 것이다.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의 개막작이 시사 하는 바는 우리 반대편의 시각으로 청소년 너머의 삶을 아우르는 것일 것이다.


    <탕왕>: ‘균열 난 근대의 초상’


    <탕왕>은 태국의 지금 현실을 네 명의 고등학생의 삶과 가치관과 현실 인식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각자의 삶의 고비를 맞자 길가의 신전에서 기도가 이뤄지는 대가로 태국 전통춤 탕왕을 추겠다는 맹세의 기도가 이뤄지자 이들은 탕왕을 배우게 된다. 싱가포르로 유학을 가는 면접을 치루는, 이 중 한 명의 친구가 빠진 탓에 남녀 구성을 맞추지 못해 모두 여자 복장을 하게 된 세 친구의 탕왕 무대는 조롱과 수치로 물들게 된다. 이는 유키스의 ‘0330’ 무대를 따라 하며 케이 팝 열풍을 증언하는 그 중 한 친구의 무대와 대비를 이룬다.


    태국 전통의 신들, 유일신 사상이 아니기에 ‘정령’으로 번역되는 이 신에 대한 믿음의 문제는 그들 윗세대에게는 비교적 확고한 것이지만 이네들은 그것을 합리주의적이지 않은 것이라 치부한다. 그럼에도 문화적인 관습 차원에서 혹시나 하는 믿음에서 기도를 올리게 된다. ‘신은 죽었다’의 니체의 문장이 근대 이후를 낳는 하나의 시대를 앞서는 선언이었음을 상기한다면, 이들의 시각은 사실 근대 이후를 사는 우리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우리의 아주 윗세대는 제사를 지내고 또 조상신을 믿지만, 합리주의적 시각을 가진 우리는 그것을 전통으로서 여기며 따르거나 따르지 않는 것처럼. 그리고 이는 역설적으로 태국에 갖는 선입관을 깨는 것으로 한국 관객에게 돌아온다.


    이들이 갖는 전통에 대한 회의와 함께 개발도상국이기에 “영원히 개발”되어야 한다는 자조적인 농담이 불편하게 더해지며, 그리고 뜬금없이 태국 전통춤을 신비롭게 그리고 만족한 듯 바라보는 한 외국 관광객의 시선이 거북하게 다가오며 탈식민주의 이후에 재출현하는 문화제국주의적인 관점이 태국을 그리고 같은 아시아의 우리를 통과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그래서 케이 팝의 문제는 한국과 태국의 위상차의 문제로 절대로 환원되지 않는다.


    조그만 네모난 틀을 그리며 마지막 탕왕의 무대를 치루는 데 있어 이 전통을 어떤 균열 없이 전유하며 춤출 수 없는, 곧 케이팝을 춰야만 세련되고 현대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현실, 그래서 한 명씩 이 틀을 빠져나 강한 수치심을 갖고 사라지는 친구들의 모습은 꽤나 강렬하다. 


    <파란 눈의 알리>: ‘다문화 사회 속, 삶의 간극들’


    이 영화는 꽤나 불편하다. 다르덴 형제가 여과 없이 현실을 잡는 것처럼 또한 어떤 특별한 윤리의식으로 주인공들의 삶을 이끌어가지 않는 것과 같이(가령 ‘주인공은 윤리적이다’ 내지는 ‘영화는 윤리적인 삶의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의 도덕적 정언 명령이 지배하는 것을 벗어나서) 영화는 죄책감 없이 부모 세대의 메시지에 아랑곳 않고 탈선하는 청춘들의 모습을 그린다. 동시에 이탈리아인과 무슬림이 공존하는 동시에 문화적인 간극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그에 속한 각각의 두 친구 이집트인 알리와 이탈리아 본토 태생 스테파노를 통해 드러낸다.


    이러한 여과 없는 두 친구의 탈선은 그것을 옹호할 수만은 없기에 꽤나 불편하게 다가온다. 영화는 정해진 현실의 결과물을 제공하는 대신 특히나 우발적 사건들을 마주하며 정처 없이 살아가는 알리의 모습을, 무미건조한 하루하루의 요일을 이탈리아어와 이집트어 자막으로 동시에 지정하는 가운데 제시한다. 자신들만의 종교와 그에 대한 신념을 유지하고 살아가지만, 이탈리아라는 큰 테두리는 그것을 하나의 문화적인 관습으로 바라보게끔 한다. 


    ‘푸른 눈의 알리’는 결코 푸른 눈이 될 수 없는, 그래서 늘 푸른 렌즈를 끼는 알리의 반복된 행위를 비춤으로써 전통이나 현실에도 전연 얽매이지 않는 알리의 모습에 새겨진 무의식적 욕망을 조감하는 동시에 다문화 사회 속에 내포된 문화적·인종적 심급과 이데올로기를 드러낸다.


    <세상의 종말> : ‘어둡고도 찬란한 세상 풍경’


    이 영화는 폐막작을 하루 앞둔 영화제의 마지막 상영작들의 하나였다. 흑백으로 만든 영화는 눈부신 젊음을 보편의 과거로 치환한다. 별다른 이야기 없이 햇빛 아래 그들의 해변에서의 유희와 속삭임들은 잡을 수 없는 눈부신 젊음 그 자체를 현시한다. 또한 야외 클럽에서 입장 불허로 화가 난 아이들이 저지른 마을 정전 사태는 제목을 환유하며 멈춰 버린 곧 기억의 일부가 된 그래서 영원한 한 찬란한 한 순간으로 역설적으로 피어난다. 


    어떤 메시지나 주제도 주어주지 않으려는 감독의 무심한 듯 확고한 의지의 산물로서 영화는 어른의 세계에서의 스테레오타입화된 질서 너머의 시각을 충격적으로 안긴다. 마지막 어둠의 세계는 <매그놀리아>의 ‘개구리 비’와 같이 세상 전부를 덮는 동시에 우발적이고 돌연히 나타난 삶으로서 꽤 큰 공명을 가져온다. 


    ‘세상의 종말’을 통해 세상의 또 다른 시작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미처 알고 있었던 일’들을 통해 삶을 새롭게 조감할 수 있지 않을까. 전통과 현대, 서로 다른 문화의 긴장이 주는 삶에서 갈등과 균열을 겪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통해서, 적나라한 현실의 이면을 들여다보며 역설적으로 삶의 희망 역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내년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를 기약하며.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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