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블루 바이씨클 프러덕션, 연극 <거짓말 게임>: '치유적인 관계 맺기'
    REVIEW/Theater 2013. 8. 16. 02:19


    ▲ 블루 바이씨클 프러덕션, 연극 <거짓말 게임> [사진 제공=블루 바이씨클 프러덕션] (이하 상동)


    무대는 어둠 속 영화의 섹스의 신음소리만을 취한다. 이는 ‘택수’(김준삼 배우)를 자극하지 못하는데, 이는 그의 신체적인 증상인 단순 발기 불능의 실제적인 문제 외에, 소음으로 흘러가는 미디어의 과잉 정보와 그것의 자극적인 일면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현대인의 모습의 궤를 이루는 가상적인 부분과도 연관이 된다.


     남자에게서 성욕은 그대로이되 발기는 일어나지 않는 모순적인 상황은 감각과 생각은 상응하지 않고, 감각은 또한 통제되지 않음을 어느 정도 도식적이고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실제로는 하지 못하되 생각과 입으로는 무한히 자신의 역량을 뽐내는 행동은, 지배와 통제됨, 주체와 대상의 이분법적 의식에 사로잡힌 남자의 정신세계를 은유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한편 매체와 성의 상응관계 또 그들의 과잉 정보와 실제적 감각의 무뎌짐은 그의 직업상 그를 애타게 하는, 목숨 걸게 하는 시청률이라는 것에서도, “1초를 못 참고”, “채널을 넘기는” 시청자의 관계로도 그 은유의 측면은 연장되어 드러난다.


     이 감각과 이성의 분리, 오만한 지배자의 모습을 띤 이 무기력한 (현대인을 표상하는) 남자는 다리도 발기도 멈춘 상태라는 점에서 실제로 무기력한데, 그의 생각은 전과 동일한 반면 그의 다리와 성기는 앞으로 또 위로 각각 나아가지 못한다.


     이는 중단됨 없는 전진의 연속이 단속적으로만 의미가 소멸·발생함을 의미한다. 동시에 이 머리는 이제 목소리로 여자들에게 지배를 형성하고자 한다. 마치 영화 <한니발>의 ‘렉터’ 같이 은근하고 기분 나쁜 목소리(이는 물론 목소리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닌 캐릭터와 이야기 구조에서 나오는 정서상의 문제이다)다. 어쩌면 실재적인 것은 이 목소리, 몸은 가만 있되 강렬하게 무대를 짓누르는 또 퍼져 나가는 이 목소리, 마치 ‘아쿠스메트르’처럼 몸과 괴리되어 어딘가 다른 곳에서 나오는 듯하다.



     이 목소리는 노래를 할 때는 온전히 음악의 세계에 침잠하는 고독한 한 인간의 나약함과 진심을 모두 내포하는데(가령 조덕배의 ‘꿈에’), 이는 곧 이 남자의 움직일 수 없음을 은폐하는 오만함에서 비롯되는 지배의 연장 또한 정말 이 움직일 수 없음 자체가 하나의 불가능한 한계이자 그에 대한 갈망으로 점철되는 그 자리를 가리키는 가장 큰 표지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남자의 오만한 입의 무력한 권위를 그의 발기 불능을 직접 유도해 낸 후 그의 심리치료사로 그의 삶 한 부분에 들어올 권리를 획득하게 되며 등장한 유리(배우 정혜영)는 여타 부타 말 대신에 그를 예술이라는 것을 ‘듣는’ 조건을 만드는 것으로만 치료를 시도하게 된다.


     이는 그가 자연스럽게 그 예술의 힘에 감화되어 감의 결과를 낳는다. 한편 그가 원작자 곧 생각만이 중요하다는 인식에서 그는 점점 원작자의 시각이 원작에 해당하는 사실들을 그들의 입장과 관점에 맞춰 바꿔 나감을 역설하는 입장의 변모를 맞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는 그가 의식에 내재적인 만족을 얻으며, 작곡가의 시작점이 아닌, 연주자의 개성이 그 곳을 새롭게 표현할 수 있음을 스스로 인식하고 인정하는 시기와 상응한다. 이는 연출가, 예술가에 대한 관점을 표출하며 상처의 치유와 지난 관계의 짐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관계 맺기의 메시지라는 한 축을 이룬다.


     ‘거짓말 게임’은 두 사람의 진심을 드러내는 유효한 장치가 된다. 이는 곧 진심을 머뭇거리며 말하는 대신 반대되는 말을 과감하게 전유하며 진심을 그 과감함의 포즈로 드러내며 가능한 것이다. 물론 이성적인 유희의 측면도 곁들어지면서.



    둘은 이 새로운 관계, 지난 관계로부터 발생한 상처 받은 나에 대한 치유, 또 그 과거의 나, 거리를 두고 나는 나에 대한 동정의 측면으로 상대방에게 여자가 남자에게 다가가고 또 다시 역으로 남자가 여자에게 다가가게 된다.


     ‘걷는다’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지점 대신, 그의 독선적인 사고가 관계적인 사고로 열어젖히는 지점으로 그가 조금이라도 회복했다고 하는 것과 맞물린다. 하지만 여전히 그가 걷지 못한다는 것은 이 몸이라는 실재가 생각과 의지와는 전혀 다른 타자로 기능함을, 최후의 한계점임을 가리킨다. 


    둘은 이 새로운 만남으로 삶을 다시 추어올리고 문득 헤어진다. 그리고 만나기보다 다시 바라본다. 이들의 하나의 시선을 그들만의 내밀한 시선을 이루는 순간에 남자 역시 일어나 있고(적어도 다시 걸을 수 있게 됨을 상정하며), 판타지는 충족된다. 그리고 어쩌면 다시 시작된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건 과거의 일은, 그리고 트라우마가 없던 행복했던 과거 너머의 과거로 새로운 관계의 시작일 것이다. 이러한 끝은 조금 급작스러운데, 어떤 가능성으로 한계를 덮고 있기 때문이다. 내지는 미래를 마치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벌리며 갑작스런 환상의 시차를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