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준 2013.07.15 23:33


▲ 연극 <그와 그녀의 옷장>(오세혁 연출, 극단 걸판) 포스터


옷: 분리 불가능한 '한' 사람의 몫


말 없는 포즈들·움직임들의 인트로는 사회의 특정한(신분 내지 지위를 가졌다는 점에서) 그리고 불특정한(대표성을 지닌 누군가라는 점에서) 현실을 재현하며 경쾌한 음악 속에 전경화(前景化)된다.


옷은 신분·지위·삶의 내력을 상정한다. 이는 패션이 아니다. 굳이 패션을 대입하자면 스테레오타입화된 패션이다. 


같은 업종에 있는 친구이기도 한 강호남과 김영광은 한 명이 회사를 나가야 한다는 말에 모자와 옷을 하나씩 나눠 갖는다. 온전한 작업복 한 벌은 두 사람의 분리불가능한 몸을 따라 분절된다. 의상은 이제 단순히 지위를 상정하는 것을 너머, 일종의 표피로서 본질을 점거하고 가상으로 바꾸는 데 이르며, 일하고 돈을 받을 수 있는 몫으로 구체화된다. 온전한 한 벌이 될 때 그 옷을 입은 한 사람만이 온전히 직장에 머물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된다. 그 전까지 두 사람의 몫은 불완전하다. 아니 부재한다. 


적(敵)과 가족 사이


강호남은 ‘청카바’(청재킷)를 입고 싸움으로 이름을 날리던 젊은 시절을, 옷장에서 청카바를 발견하는 순간 이후 회상·재현하게 되는데, 두 친구는 같은 회사에 입사해 열심히 컨베이어벨트를 달리던 중 어느 날 사장이 열어보지 말고 묻으라는 가방에서 노조를 하던 죽은 동료의 작업복을 발견하게 된다.


 검은 가방은 극에서 색깔이 특별한 상징을 갖고 있는 것과 관련해 악을 상정한다. 열어보지 말라는, 금기가 덧씌워진 유혹의 이 가방은 ‘역逆-판도라 상자’와도 같은데, 이것은 열어보고자 하는 욕망이 하나의 유혹으로서, 곧 열어보지 말라는 명령에 덧대어진(후차적으로 따르는) 판도라의 상자의 사례와는 달리, 열어 보지 말라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유혹으로서(게다가 달콤한 유인이 부가되어 있다) 열어봐야 함의 ‘유혹 내지 금기’(사장의 말은 비뚜름한 금기로 또 유혹으로 처음부터 주어져 있다)에 덧대어져 있기 때문이다. 


곧 사장의 말은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알약의 유혹과도 같다. 알약을 먹으면(=이것을 그냥 묻으면) 달콤한 현실이 미래에 보장된다고 한다. 반면 진실을 알았을 때(=실재에 직면했을 때) 이는 불편함을 주며 현실로의 봉합에 균열이 발생한다.


 이는 ‘물론’ 선의 판단으로 돌아가야 한다. ‘선은 선택될 것이다’, 그가 그의 잘못된 선택으로 완전히 변용된 주체로 달라진 세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전제하면 극은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방향을 틀어야 함은 물론, 이 옷장이 하나의 추억으로 기억에 별 문제 없이 삽입될 수 있으려면 묻는 대신 옷은 진실을 밝히는 데 실재적 증거물의 기능을 해야 한다.


 이 올바르지 않은 (대)기업의 횡포는, 인물들의 삶을 흔들며 그 기저에 흐르는 힘은 그 주체를 앞세워 드러나지 않지만, 기껏해야 대리자 정도를 통해 드러나지만 극 전반을 관통한다. 앞서 아버지 강호남에게 가해진 부당한 유혹은 “비정규직 철폐”를 두건에 새긴 어머니의 ‘투쟁’으로 이어진다. 어머니는 용역 깡패와 뒤섞인 아들과 우연히 마주쳐 아들인지 뒤늦게 인지하게 된 후 극은 적막에 봉착한다.


 이 적막은 어머니 오순심과 아들 강수일의 관계가 적(선)과 적(악)으로 재배치되는 형국이 뒤늦게 어머니와 아들의 깊은 상처로 돌아가는 순간을 포함한다. 아들을 사정없이 계속 가격하는 행위는 점점 힘이 빠져 검은 점퍼에서 검은 바지로 손이 내려오는 디테일한 측면의 실재적인 순간을 낳는다.


 뒤늦게 아들은 그 화가 식고 그리고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엄마를 대신해, 그 침묵을 침묵으로밖에 놔둘 수 없는 어머니의 말을 대신해, ‘어머니’라는 첫 마디를 꺼낸다. 이어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는 재빠르고 자리를 찾고 이 ‘적’의 관계는 무마되고, 충격과 분노는 빠르게 봉합된다. 


아들의 일은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나의 일이며, 아들의 악의 대타자는 나의 대타자이기도 하다. 적막은 가까스로 꺼낸 말, 아니 되찾은 원형적인 말, 더 정확히는 파열된 신체의 한 부분으로 이어진다. 먹먹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사랑과 투쟁의 상관관계


 세 번째(에피소드)는 상관의 눈치만 살피며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는 아들 수일에게 빨간 옷의 비정규직으로서 노조위원장인 심순애는 평소 이상형에 딱 겹치며 등장하고, 자연스레 수일은 그녀에게 사랑에 빠진다. ‘사랑으로 승리하자!’는 투쟁의 승리를 사랑으로 치환하는 정치적 기표로, 어느새 진짜 사랑이라는 매개가 투쟁의 힘으로 거듭나는 순간으로 구현된다.


 이는 단순히 이상형의 표피적인 사랑이 아닌 투쟁하는 여자의 투쟁을 같이 하는 것의 또 다른 투쟁에 다름 아닌, ‘투쟁의 전유’가 뒷받침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사랑과 투쟁을 하나의 계열에 놓으며 투쟁을 사랑으로 손쉽게 치환하는 슬로건처럼 매우 자연스럽게 이뤄지는데(실상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현대 대부분의 사랑은 조건이 절대적으로 수반된다), 그는 결국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지 못하는데, 이 역시 의미심장하다. 


그는 그녀가 아닌 ‘빨간 옷’을 예쁘다고 하는데, 이는 사랑을 대신 표현한 것이라기보다는 직접 전했다고 보는 게 더 맞다. 빨간 옷 곧 투쟁은 이미 (슬로건이 의미하듯) 사랑이었고 여기서 남자의 진정한 사랑은 여자가 진정 온몸을 받쳐 추구하는 것인 투쟁까지 수용(사랑)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여자의 땀에 전 빨간 옷‘마저’, 아니 빨간 옷‘까지’, 딱 빨간 옷‘만’(이 옷은 그녀의 정체성이며 더군다나 이 투쟁을 끝내지 않으리라는 점에서)을 진정 사랑할 수 있는 게 사랑이다. 


가족이란 유토피아적 메시지


마지막 가족이 되어 강수일과 심순애가 부부가 되어 그들이 똑 닮은 지난 세대의 두 부부에게 절을 올리러 갈 때 ‘투쟁’을 통한 사랑의 달성은 이제 그러한 삶의 기호를 자연스레 수용할 수 있는 삶의 이력을 가진 가족의 모습 아래 따스한 사랑과 함께 이전·확장된다.


 앞서 ‘어머니’라는 말이 적의 경계를 일시 허물었듯 가족 이데올로기는 이 지난하고 불편한 투쟁을 어렵지 않은 것으로, 한 명은 검은 점퍼의 적만을 처리하면 되는 것으로 처리하고 만다.


 곧 자본의 거대한 흐름과 통제, 투쟁이 드러내고자 하는 비가시적 세력의 지점은 사실상 쉽게 분쇄되거나 소멸될 수 없다는 점에서 이와 같은 결말은 손쉬운 해피엔딩으로의 봉합이라기보다 오히려 정말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공교롭게 서울광장과 매우 가까운 극장에서 나오면서(13일 토요일 저녁 7시 공연을 관람했다) 국정원 사태 관련 촛불시위가 거대하게 펼쳐지는, 곧 그것을 광대하게 뒤덮은 경찰(치안)이라는 경계로 먼저 그것이 확인되는 현장에서 투쟁, 거대한 싸움은 그리 쉬운 것도, 또 결과가 손쉽게 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 명백해지는 순간을 맞았다.


 처음 무대에 나와 관객에게 천연덕스럽게 말을 건네던 배우이자 연출은 역시 그렇게 마무리한다. 어쩌면 앞선 가족 이데올로기에의 봉합이란 (어찌할 수 없는) 결말은 이 불편한 진실의 잠재적인 면을 계속 품은 채 어떤 이 연극의 표면적으로 갖는 재미와 즐거움으로 너무 불편하지만은 않게, 나아가 희망을 안고 공연에 들어갔다 나올 수 있게 하려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 경계 없음, 열림의 기호는 다시 ‘더 큰 가족’이란 하나의 이념을 그리고 있는 것 아닌가.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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