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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 <순이 삼촌>: '끝나지 않은 것에 대한 물음들'
    REVIEW/Theater 2013. 6. 25. 23:07

    '들리지 않는 침묵'


    ▲ 지난 6월 6일 열린 충무아트홀 중극장블랙에서 <순이 삼촌> 프레스콜 시연 모습(이하 상동)




    영혼들을 소원하는 방식, 단조의 아티큘레이션을 두기,  ‘위기’를 단속적으로 구현하는 완성되지 않는 사운드.


     '음악의 위태로움'으로 시작되는 <순이 삼촌>은  “잿더미 속에서 살아남은 내 아버지의 삼촌” 곧 순이 삼촌에 관한 이야기다. 무대는 모던하고 자연지형을 상정한 듯한 튀어나온 계단과 한 사람이 겨우 통과할 수 있는 좁은 길로 형상화된다.


     이 딱딱한 자연 지형은 어쩌면 현재적 삶으로 녹아들어 그 기억들을 숨기고 있는 듯하다. 무대 공기는 건조하고,  ‘침묵’들은 들리지 않고, 무겁게 현실의 말들을 내리누른다. 여기 음악이 끼어들 틈은 없다.


     진정한 현재로부터 출발은 불가능한가. 제사에서 영혼들의 밥과 순이 삼촌의 식탐은 묘하게 겹쳐 보인다. 그가 제사상 음식들을 찾고 탐하는 동안 혼들은 그를 따라다니며 숙덕거리고, 이러한 숙덕거림의 다른 이름, 곧 소문은 그녀를 현실에서 옭아매는 실제적 효과로 드러난다.


     그녀에게 들리는 이 목소리들은 일종의 환청‧환시일까. 차라리 그의 살아남음 자체의 죄의식에서 이 모든 것은 온다. 그렇다면 이 배고픔 역시 그녀의 영속되는 갈망일까. 죽음의 더미에서 삶의 표지를 갈급하는/채워지지 않는 과거에의 갈증일까. 


    '호명과 함께 찾아오는 존재'



    황톳빛 한복들은 이러한 시간의 그러모음을, 과거와 현재의 층차 없는 현실을 상정한다. 순이 삼촌의 젠더는 남성이지만, 실제로 성별은 여성이다. 역할과 맞물려 중성성‧양성성의 이름은 곧 특정 지을 수 없는 역사의 존재들을 현상시킨다.


     또한  ‘순이’의 ‘이’는 편하게 이름에 붙여 부르는 조사인데 곧 하나의 이름이 된 이름이다. 이 말을 따라 정착된 이름에, 친숙함을 더해 여자는 남자의 역할로 이름상으로 전유된다. 그리고 이 가족 없이 홀로 남겨진 순이 삼촌은 그 존재를 보기 전까지 그저 어느 친근한 한 남자어른으로 존재하며 직계가족이 아닌 탓에 외부의 영역에 머무르게 된다. 


    다시 그 이름을 호명함으로써만 존재한다. 어떤 외부자로서 순이 삼촌은 (누군가에게는 불청객으로서 뜬근없이)’찾아오거나’ 기억과 말에 의해 ‘우리’에게 현상되는 그런 존재가 된다.


    애도 불가능의 영역




     파국은 기억으로부터 온다. 그녀의 현시에 동시적으로 오는 아픔의 공명은 과거‧현재의 알 수 없는 시차, 거리를 둘 수도, 벌릴 수도 없는 곧 ‘측정할 수 없는 거리’로 ‘그 자리에서’ 그것을 겪고, 있어야 한다. 


    애도가 불가능한 기억, 현재로 나아갈 수 없는 기억, 몸의 한 부분이되 몸에 배재되어 있어 다시 ‘자신’과 거리를 벌리며 스스로를 옭아매는 기억, 순이 삼촌의 사라짐과 묻혔던 역사의 집단적 기억이 체현된다. 곧 순이 삼촌이란 불편한 존재가 일종의 기억 덩어리로 4.3사건은 과거를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뒤돌아 있는 두 구의 얼굴 없는(안 보이는) 시체로 짧고 불명확한 언급의 차원으로, 역사의 과오에 대한 반성의 차원으로 부상하고, 다시 무대 중앙에서 경사진 단에서부터 가상적으로 투여되는 종소리에 의한 떼-죽음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선다. 곧 텅 빈 무대 중앙은 집단적 죽음을 비추어 이름 없는 자들의 죽음이 기입된 공간으로 바꾼다.


    '결말의 열어젖힘'




     그 죽음들을 지켜만 봐야 하는, 그리고 울부짖어야만 하는, 그리고 죽음을 다시 기록할 수 없는, 획정 짓지 못하는 어느 한 순간에서 사라져야 한다. 그렇게 순이 삼촌은 과거를 쫓아간다. 그리고 과거를 보듬는다. 자신의 과거는 스스로밖에 보듬을 수 없다는 듯.


    그 열린 문은 어디일까. ‘시간의 빗장’을 열어젖힌 것일까. 영원한 타자의 시간일까. 상처는 마지막 죽음의 증거는 그렇게 봉합되는 것으로 충분한가. 여러 의문점 속에 순이 삼촌의 뒷모습은 (남은 이들의) 삶의 또 다른 외상일까. 아님 평화적 나날의 찾아옴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순이 삼촌의 영원한 안식일까.


    이러한 갑작스러운 끝은 그녀와의 불편한 조우, 그녀 스스로 외재적인 무엇의 잉여와 그것의 체현이 주는 또 하나의 불편함 외에도 이 무지막지한 과거라는 타자와 현재 우리가 만나는 지점을 징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도무지 그에 답할 수도 없는, 단지 우리의 문제가 아닌, 그것을 기억하는 이의 기억에서 풀어야만 하는, 그래서 단지 부정에서 영원한 긍정으로 넘어가는 시점에 대한 희망만이 있는, 그러한 현재 (과거와 기억에서의) 타자로서의 우리의 시점을 현상하면서 동시에 그들을 타자화하는 우리 자신의 혐의를 은폐하면서.


    갑작스러운 끝이었지만 많은 관객에게 그만큼 긴 여운 내지는 감동을 줬다면, ‘역사의 마지막 아우라’는 역사의 장이 넘어감을 또한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이것은 순전히 감동보다는 어떤 불편함과 끝나지 않음으로 귀결됐어야 할 것이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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