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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다 히데키 연출 <더 비(THE BEE)>: '실재의 내파, 그리고 벌이 되다'
    REVIEW/Theater 2013. 6. 10. 19:48

    '미궁에 빠지다'


    ▲ <더 비(THE BEE)> 작| 노다 히데키(Hideki Noda)•콜린 티번(Colin Teevan), 연출| 노다 히데키(Hideki Noda)공동 제작 | 명동예술극장/동경예술극장/NODA•MAP [사진 제공=명동예술극장] (이하 상동)


    아들 녀석의 선물을 산 샐러리맨 ‘이도’는 자신의 집을 향하던 중, 길이 폐쇄되어 집으로 가는 길이 봉쇄당한 현장을 맞게 된다. “Yes No”로 변전되는, 집을 들어가는 데 구하는 허락에 대한 경찰의 대답은 기자들의 인터뷰로 어느새 바뀐다. 그는 그의 집이라는 실재 앞에서 현장에 묶이게 된다.


    사건 구획을 경계 짓던 경찰들의 말이 그를 옭아매는 것에서 정신없게 그의 삶을 겨누는 카메라로 대상이 옮겨지며 남자는 그저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수동적 입장에로 놓이게 된다.


    이 와중에 역동적이고 숨 쉴 틈 없는 무대(그의 주변)는 구성된다. 영사막 기능을 하는 스크린이 끝 부분을 약간 말아져 올라간 상태에서 여기에 쉴 새 없이 그림자들로 분화되는 사건을 둘러싼 존재자들이 죄수 탈옥의 전-사건을 구성한다.


    수사관들은 보이지 않는 범죄자의 존재를 강하게 현상시키고, 이도는 자신의 집에 들어가지도, 어떤 조처를 취하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인다. 이는 마치 (배우로서는) 무대에 세워지지 않는 조연의 자리,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는 미약한 범인의 자리, 현실에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보이지 않는 현대인의 자리를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차지하게 된다. 


    자신의 (존재의) 집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점은 카프카의 『성』의 도달 불가능한 지점을 상기시키는 것과 함께 미약한 현대인의 자리를 표상한다. 곧 ‘저 앞에는 실제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미디어는 그곳에 접근할 수 없게 그를 강제한다.’ 


    말하자면 이중의 힘이 실제적 위협에 의해, 또 법적 강제에 의해 존재하게 되는 셈인데, 거기에는 ‘실재’ 대신 현상으로 그를 단지 매개하고, ‘과장’하는 측면으로 실제(실재)에 다가가는 대신 그것을 이슈로 바꾸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도는 이 ‘두 가지 권력(힘)’ 앞에 자신의 삶은 철저히 기만당하고 또한 차단당하고 있다. 


    남자(실제 영국의 여성 배우 캐서린 헌터Kathryn Hunter이다)의 목소리는 허스키하며 긴 단발머리에 중성적인 외양을 갖고 있는데, 이는 특별한 개성을 내세우지 못하는 소외된 인물에 근접하게 된다. 만화 속 인물의 축 처진 톤은 작은 신체를 거치며, 외화면 목소리로 튀어나오는 듯한 측은한 존재로 그를 표상하게 하는 가운데, 그 목소리와 작은 신체는 그러한 정서를 동일한 긴장으로 지속케 하는 실제적 지지물로 기능한다. 


    '피해자-가해자 되기'



    그는 경찰과 함께 자신의 아내를 납치한 야쿠자 오고로의 부인을 상대로 설득 작업을 벌이기 위해 그의 집을 찾는다. 그와 동행하는 마초적이고 자기 과시적인 허둥대는 경찰관 한 명은 전혀 수사에 도움 안 되는 헛소리를 연발하는데 이러한 또 하나의 범죄자와 같은 태도를 마주하던 이도는 그의 머리를 향해 몽둥이를 휘두르게 된다.


    이러한 ‘우발적인 범죄’는 개입할 수 없는 그의 처지에서 하나의 도발이자 탈출구와 같은 행위와 다름없는데, 경황없이 사건들이 벌어지는 극에서 그리 황당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 사소한 폭력은 일종의 법을 전복하는 ‘신적 폭력’의 일환으로 거듭나는데, 그 이후 총(권력)을 부여잡게 되고, 오고로와 같은 처지에서 동일한 ‘또 다른 상황’을 만들게 된다.


    이것이 이도의 가장 영리한 전략에 다름 아니다. 곧 범죄자가 되기와 동시에 범죄자를 자신과 동일한 처지의 피해자 위치로 만들기, 그의 가장 소중한 것들에 위협을 가함으로써. 


    곧 실재에 접근하는 대신 ‘가상적으로’, 범죄자와 동일자의 위치에서, 사건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동행했던 경찰에서, 이도의 손에 의해 쓰러진 경찰(곧 대상으)로, 야쿠자 아내의 아이로, 다시 오고무로 분하며 ‘둘’(오고무와 이도)는 ‘실제로’ 같은 공간에 있게 된다.


    그 들어갈 수 없는 실재에 실상 그가 몽둥이를 휘두르고, 총을 쥐게 되었을 때, 그가 도달한 오고무의 위치는 이제 실제 그의 자리와 전도된, 또 그 자리에 들어온 효과가 ‘연극이란 장’에서는 (역할의 변전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실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벽 중앙에는 TV가 그려져 있고, 그 위에 영상이 덧씌워지다 그것을 뚫고, 사람이 튀어나와 콘텐츠를 이룬다. 이 협상의 과정은 TV라는 매체가 편재(遍在)하며 요리라는 이 현실과는 전혀 상관없는 콘텐츠를 중계하는 배경이 되기도 하는 가운데 곧 ‘실재’는 실재로 남는 대신에(그 실재를 대신하기도 하는), 동시에 가상으로 구현되어 복사되듯 중계되고 있다.


    한편 범죄자와 대칭의 자리에서 그 바로 옆에 서서 하나의 전화기로 직접 연결된 채 통화하며 오고무가 그의 아들로 분할 때 극의 재미는 절정에 달한다. 연극이라는 매체의 ‘역할의 자유로운 전이성’이라는 메타적인 ‘연극의 규약’을 증거로 하는 동시에 그로써 전화라는 매체의 편재성을 이보다 더 분명하게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있을까. 


    '진정한 외부성, 벌'



    벌 한 마디가, 창문을 열자 침입하는데, 이 벌은 그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다. 이 벌이야말로 예상치 못했던 또 다른 외부성, 곧 실재의 출현인 것이다(또는 선한 이도의 그에 대칭되는 악한 이도의 무의식선상에서의 귀환이다) 


    그는 그 벌을 오고무 아들이 가두자 신나게 춤을 추고, 일본어로 각색된 경쾌한 음악과 춤이 앞서 이도를 완전히 당황시켰던 무게를 대신한다. 이는 긴장에서 난장으로 어떤 폭발적 전이가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다.


    폭력은 어디서부터 오는가. 그것은 ‘벌’이 나타나는 공식을 따르자면 불가피한 상황에서 매우 당연하게(컵을 벌리는 동시에 살아 있다면 튀어나오는 것이 당연하므로), 그리고 급작스럽게(그 출현을 예상할 수 없다는 점에서) 또 이성을 교란시키며(마구 공간을 휘저으며, 도저한 공간의 부피 자체로 다가오기에) 온다. 


    이 벌이 일으키는 벌-효과(≒나비 효과)는 오히려 그 ‘원래의 범죄자’의 행위보다 더 앞서 더 상위의 자리에서 그의 행위가 벌어지고 있다. 실재는 진정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가 닿을 수 없는 어떤 자리는 이제 도리어 그로부터 체현되고 있다.


     ‘특성 없는 인간(무질)’은 그래서 이 악랄한 범죄자가 되는 가장 순수한 텅 빈 매체로, 가장 커다란 반전의 변화를 생성하게 된다. 그는 오고무 아들에게 들려주는 옛날이야기에 자신을 대입시킨다. 자기 지시적 언어를 구성하며 스스로를 그 신화적 인물에 합치시킨다. 이도 자신을 합리화시키고 동시에 다른 인격으로 분화시키는 셈이다.


    숭고한 일상과 공허한 내면, 지탱할 수 없는 현재



    오고무 아들의 연필로 표상된 손가락은 계속 잘라(실제로는 부러뜨려) 종이봉투에 담아 오고무에게 보내고, (‘강간’에서 어느새) 섹스를 하고, 셋이서 식사를 하고, 씻고 옷을 입는 일상의 반복된 패턴이 서정적 음악 아래 펼쳐진다. 손가락은 10개고 이것들은 언제까지 계속될 수 없는 위태위태한 현실의 도발의 한계를 가리킨다. 


    목소리 없는 침묵의 광경으로 비춰지는 그 안은 이 ‘숭고한’ 행위, 그리고 공허한 행위들이 의미 없는 현대인의 삶에 대한 우화를 상징한다. 그 자체가 이도라는 인물로 표상된 평범한 한 가정의 일상인 것이다.


    앞선 일상이 진행되는 과정의 속도에 맞춰 느릿느릿 걸어가 그래서 마치 유령처럼 확고하게 현실에 자리를 가져가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뒤에 중절모를 쓴 남자의 실루엣은 이 반복된 사건을 매개하러 온 외부인-경찰로서, 협상의 위협의 지지물이 되는 대신에 오히려 슬픈 이도의 내면인 것 같이 생각된다. 


    더 이상 다른 손가락이 없게 된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려던 참에서 벌 세 마리가 잔에서 튀어 나오고 그의 신경을 곤두세우게 하는 대신, 방전된 의식을 상정하는데, 무대 전체로 변해가며 마치 하나의 검은 배경에 흰 그림자인 듯한 형상의 세계가 된다.


    이 가득 찬 어둠은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현재를 가리킨다. 이는 세계의 끝으로의 내면의 내파이다. 한 순진한 가장의 범죄자의 자리로의 전도, 그리고 순진함의 악랄함으로의 변전, 그리고 미래를 겨우 지탱하던 가장의 자리에서 지속할 수 없는 미래 없는 현실의 자리로, 쩔쩔매던 가장의 자리에서 ‘팔루스’를 획득한 가부장적 아버지의 자리로.


    벌이라는 귀찮은 외부 잉여물은 이제 그 자신을 가득 채운 내부의 형상화로 표현된다. 곧 자신에게 갑작스레 부과된 피동적 사건은 이제 그 자신이 적극적으로 재현하는 능동적 사건이 된다. 


    이제 그리고 그 사건의 창출의 자리에서 현실은 멀어졌고 더 이상 현실은 그것을 이전의 자리에서 지속하거나, ‘현실의 외부’에서 ‘또 다른 현실’(현실은 참고로 매체에 의해 장악됐고 이도의 현실은 그로부터 벗어나 잊히게 되었다. 


    현실의 외부는 매체가 표상하는 현실의 은폐된 진실과 같이 기실 그 자체로 곧 또 다른 현실로 튀어나오지 못한다)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한 시점이 올 것이다. 곧 그의 내면이 하나의 세계가 되는 세상, 벌 한 마리가 세계가 되는 그런 순간의 불가능성의 지점에서 <더 비>는 멈춘다.


    P.S. 이도와 오고무의 중첩성


    그가 손을 자름은 어떻게 보면 오고무의 입장을 체현하며(오고무의 자리를 획득했다는 점에서) 이도라는 순수한 인물을 죽여 가는 것으로도 비춰지지만 스스로 이도-오고무가 되어 그 한 축의 오고무가 또 다른 축의 이도를 죽이는 것이 아닐까. 


    그 자신이 이도인지 오고무인지, 이도가 아닌지 이도인지 혼란이 이는 지점에서 이도는 벌이 외부의 것이 아니라 곧 그 자신의 세계로 전도되는 지점에서 그 알 수 없는 신체의 부속물을 자르지 못하게 된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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