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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한팩 솔로이스트] 밝넝쿨 <Fighting Room 파이팅 룸>: ‘메타적으로 위치하기’
    REVIEW/Dance 2013. 6. 3. 13:35

    메타적으로 위치하기


    ▲ <Fighting Room 파이팅 룸>(음악 권병준)의 무용수 겸 안무가 밝넝쿨 [사진 제공=한국공연예술센터] (이하 상동)


     ‘사운드 퍼포머-관료’란 절합의 존재(권병준)의 출현, 대위법적으로 울려 퍼지는 아련한 단속적 건반, 밝넝쿨의 메타-언설을 통한 ‘극장 발생’, 권병준과 밝넝쿨의 절합은 사운드 환경의 창출과 수행적으로 무대를 구축하는 두 사람의 각각의 움직임으로 나타난다.


     밝넝쿨은 현실에서의 그의 입장과 그것을 벗어나 환영적 역할로서의 연장 사이에서 그 역할을 ‘밝넝쿨’로서 수행적으로 임하며 환영과 현실이 전도된 공간에서,  ‘환영-현실’이 어떤 외설로 그 즉시 다가오게끔 만든다.


     관객의 참여를 끊임없이 독려하며 이 “여러분”이라는 그의 외침은 곧 우리 스스로의 내면에 울리는 무한정한, 불안정한 어떤 강박적 외침으로 변해 간다. 


    이는 그의 ‘말-걸기’가 관객이란 위치를 실제적이고 가상적으로 상정해 내며 그 목소리의 반복 효과가 그의 신체 너머 실제적인 그것으로서, 곧 타자에 대한 외침이 타자의 경계를 어느 순간 뛰어넘는다.


     이어 ‘여러분’의 한 타자였던 관객 자신이 관객이 보고 있는 밝넝쿨이란 존재가 무화된 채 우리 스스로에게 그 외침을 우리 자아의 일부로서 상정하는 동시에 그 외부를 상정하며, 이 목소리가 관객 안에서 순환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현실을 잉여로 위치시키기



     밝넝쿨은 이 사운드가 굴절되며 묘연한 대기의 흐름으로 머무는 공간에 주로 배회하며 들어오는 가운데 그의 몸짓을 어둠 속에서 내재적으로 작동시킨다. 대기를 층차로 수없이 미시적인 감각들의 합산으로 분절화해 내며.


    그는 스포트라이트가 중간에 그리고 사각의 면에 깜빡일 때 이 구획을 경계 짓고, 또 그를 위한 상상의 자리를 마련할 때, 그는 처음에 언급한 보이지 않는 존재 곧 “동수”를 불러낸다.


     ‘싸우는 방법’을 소개하는 밝넝쿨은 내레이션과 함께 가상의 이야기들을 만든다. 힙합의 반복된 구문의 믹싱에 따라


    권병준이 하는 역할은 동시적으로 또는 그에 앞서 사운드를 재편하는 공간감적인 사운드 디자이너 그리고 현장성을 재편하는 DJ라 할 수 있는데, 이 ‘깔아놓은 판’에 밝넝쿨은 적응하고 수행적으로 ‘연기’(演技)를 선택한다.


     이는 과장되는 것을 너머 언캐니함마저 주는데, 음향‧조명의 분절/절합이 대위법적으로 병치되는 것을 넘어 분열증적으로 조우하며 파편적인 신들의 배치 속에 그를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이 속에서 그는 괴물이 되는데, 이 사운드-조명의 집적은 거의 신체를 재배치하는 수준에 이른다. 거기에 익숙한 ‘교실종’ 이 울리고 현실을 재현하게 되는데, 스태프 한 명을 무대 옆에 투여하여 장을 변전시킨다.


     관객 안내원의 말이 들리고 극장에 대한 메타-언급이, 밝넝쿨이 등장 이후 관객을 향한 자기 지시적인 발화를 했듯,  ‘순수한 춤의 영역’의 몰입을 깨뜨린다. 아니 신선하게 현장을 환기시키는 데 가깝다. 그럼에도 이는 극 너머의 ‘현실’을 보여준다는 차원에서 인위적인 조작에 가깝다. 


    춤이라는 내용을 형식으로 전환시키기


    그렇다면 이 극장 너머의 ‘실재’는 어디 있는가. 이것이 하나의 잉여 차원에 그침은 곧 이어 푸른 조명이 아래에 비춰 마치 풀 속을 묘사한 것 같은 환상에 사로잡히게 되었을 때 그가 다른 역할로 돌아가 있음에서 역시 극은 환영의 규약 그 자체를 ‘과잉’으로 보여주며 극(장)의 규칙, 연기 되고 있음을 어느 정도 지시해 낸다.


     일종의 (드러내고 있음 자체를 상기시키는 차원에서) ‘거리두기적 과잉’으로 남는 것은 곧 이 상황을 창출하고, 더 정확히는 주어진 상황에 적응하는 밝넝쿨 자신일 텐데, 실은 우리가 믿는 밝넝쿨은, 극장의 실제 규칙이 삽입되는 처럼 모든 것은 시뮬라르크의 반복‧재생산에 불과한 것이다.


     이는 그 ‘밝넝쿨’이라는,  ‘춤’이라는 시뮬라르크를 감행하는, 현실에서의 밝넝쿨이 연기 자체를 위한 무대의 밝넝쿨으로서 연장(연장)으로 드러나는, 곧 삶과 예술의 간극 허물기 따위가 환상이었음을 실은 드러내는 것 아닐까 환영이 일어나는 무대에서 밝넝쿨이라는 실제라는 지정은 이미 어떤 균열을 예비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춤이라는 것의 내재적인 것이 그 자체의 어떤 내용으로 소급되는 대신 ‘춤춘다는 행위’, 사운드 퍼포머, 조명, 스태프, 극장 규약들을 각각 그 자체로 드러내며(물론 이는 그것 자체가 극장의 환영을 드러내는 인위적 장치라는 잉여로 남거나 클리셰적인 기호들로 남는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너머 춤을 춤에서, 무엇보다. ‘밝넝쿨이라는 기호’에 접근하며 밝넝쿨은 춤을 춘다.


    p.s. 제멋대로의 협력


     이 속에서 권병준과 밝넝쿨의 절합은 차용의 전략들로써 무대를 수놓는 DJ로서 전자의 메타적 시선과 흘러나오는 음악들을 그저 흘려보내거나 그것들을 배경음으로 두거나 또는 스스로를 과시하기의 측면에서 가져가는 후자의 표피적 전유의 몸짓은 허공에다 집짓기와 같은 겉돌기의 중첩 속에 이뤄져갔다. 


    이 끈끈하지 않은 제멋대로의 협력은 움직임의 근거를 제시하고 그 틀을 짓는 사운드와 그 사운드를 감각적으로 신체에 체현하는 잠깐의 초기 순간을 제하고는 내레이션과 과시하기의 측면의 움직임은 그럼에도 스스로의 자기 지시적인 기호들로 각각의 자취를 남기는 한편 하이퍼텍스트적 맞물림의 궤적을 만들었다고 보인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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