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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 <라오지앙후 최막심>(양정웅 연출): '최막심, 진리의 이념을 넘어'
    REVIEW/Theater 2013. 5. 29. 10:50

    삶의 초극적 의지


    ▲ <라오지앙후 최막심>, 원작 | 니코스 카잔차키스(Νίκος Καζαντζάκης) <그리스인 조르바> 번안 | 배삼식 연출 | 양정웅 [사진 제공=명동예술극장] (이하 상동)


     그리스인 조르바는 후회막심(後悔莫甚)에서의 ‘막심’으로, 한자 문화권에서의 재전유된 기표로 문화적 맥락을 원작과 교차시킨다.


     그의 굵은 목소리는 술 취한 듯한 호기로움과 녹록치 않은 삶의 이력, 그리고 대기를 묵직하게 누르며 육화하는 신체적 기표가 된다. 그의 지난 이야기-재현은 이야기되는 중에 현시된다. 이는 모든 게 실제로 ‘현재’일 수밖에 없는 연극의 당연한 규칙에 따른 것이다. 


     ‘인간은 흉악한 짐승’이라는 그의 명제에 따르면 평등‧권리와 같은 개념 따위는 개체보다 우선하는 이념적 법에 불과하다. 따라서 단지 자유롭게 현 순간에 추동되는 우주와 삶의 파도에 몸을 맡기는 수밖에 없다.


     이것이 대찬 삶의 개체적‧이상적 의지인 셈이다. 이미 니체적인 이 동물은 사랑의 순수성의 기호를 사회적인 것의 법칙을 ‘의식’하는 바보 같은 마을 사람들이나 사랑을 수동성의 바깥으로 상상할 수 없는 꿈꾸는 순수한 영혼들의 삶과도 유사성을 지니지 않는다.


    ‘로사의 기호학’



     ‘과수댁’은 ‘성스러운 창녀’의 지위를 지닌다. 누구나 범하는 성의 잉여적 기표이자 결혼과 가정으로 채워질 수 없는 결여를 풍부하게 상상적으로 채워 넣는 초월적 기표가 된다. 이는 더러움의 욕구를 제3의 매개자를 통해 신성한 영역에 이르게 하는 ‘희생물’의 또 다른 이름이다.


     “작부가 보살이지”라는 아포리아적 언어의 명명은 이 작부가 성스러운 지저분한 언캐니한 기호이며 동시에 언어(법)가 삶에 우선하는 진리로 강제함을 의미한다. 


     ‘사람은 죄가 없다’, 그 다음에 바로 호명되는 ‘로사’는 죄가 희생의 대속물 기능을 하는 문화적 장치에 다름 아님을, 또한 ‘죄’를 통해 문화와 삶의 영토를 정초함을 의미한다.


     로사의 장미와의 다른 기표와의 인접성, 꽃이라는 은유성, 그리고 무대 구조물의 로사를 향해 있어 그녀를 환유하는 기호로 거듭나는 것은 로사가 이 마을의 법을 드러내고 또 법을 제대로 작동하게 하는 상상적‧실제적 매개물, 법의 의무로서 법을 매개하게 됨을 의미한다.


    반면 나팔 소리는 중간 중간 이 마을의 경계점을 알리는 가운데 ‘이차만’의 닿을 수 없는 그녀에 대한 ‘사랑의 외부’(동시에 마을 사람과 마찬가지의 상상적 가치의 영역)를 상정한다. 곧 애초 듣지 못하는 ‘과수댁’으로 먼저 제시된 로사를 향해 매체의 불가능성의 채널을 사용한 것에 사랑의 아포리아가 있다.


    대지에의 착취



     “인생 한 순간이야”는 최막심의 철학을 함축하는데, 이 말의 직전에 일어났던 광산 사고와 같은 ‘불가능성으로서의 인생’에 대한 긍정이다. 그리고 김이문에게 바로 로사와 잠자리를 가지라는 것으로 삶의 결단적‧수행적 선택을 촉구한다. 


    곧 최막심에게 삶은 다가올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도, 그것을 욕망 않고 잠자코 머물러 있는 것도 어리석은 일일 뿐이다.


     최막심은 타지에서 결코 떠나온 것을 그리워 않고 새로 직면하는 순간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즐긴다. 최막심과의 달콤한 환상에 빠져 있던 여자 오르땅스는 이 드넓은 외부의 ‘자유’를 전혀 조감하지 못한다. 이 로맨스를 완성하는 것은 이 정도면 된다는 식의, 그리고 ‘더’의 차원을 제시하는 김이문에 따른 것으로, 그것을 상상적으로 해결하고 난 이후에 재차 따르는 ‘더’의 변증법적 잉여의 유희 속에 상상적으로만 그 로맨스 욕망은 충족되고 만다.


      ‘대지여 마음껏 그대의 젖을 빨리라”, 이 극의 잉여적으로 부가되는 외침은 다짐의 성격을 띠고 있고, 하늘에 대한 것이 아니다. 이는 신에 귀의하기보다 신을 점하고 그것을 무화시키고 삶의 영도를 정초하고 그 의지를 마음껏 펼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다가올 것을 기대하고 고대하며 ‘축복’의 영역, 나아가 구원의 영역을 상정하는 대신 단지 그것을 기다림 없이 쟁취하리라는 의지를 드러낸다. 이와 맞물려 막심은 하느님‧상제 등의 여러 다른 신의 호칭을 꾀면서 종교의 경계를 뛰어넘고 재전유해 웃음을 주는데 신을 어떤 메타적 기호로 상정하는 것이다.


    ‘죽음의 두 이름’



    100원 아편에 온 마을 사람들이 온 신경과 주의를 기울인다. 화폐 자본 교환 시스템 아래 돈은 심정적인 것과 삶의 지축을 저울질하는 수행적 효과를 동시에 창출한다. 모노톤으로 새겨져 있는 스크린에 나타나는 수평선은 닿을 수 없는 실재와 같이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효과로 노스탤지어를 자아낸다. 


    반면 이 마을에서 ‘자연사적 죽음’ 곧 목숨이 끊김은 ‘운명’의 분류에 해당 않는 모순된 사회체계를 폭로하고 비판하며 그것을 드러내는 데서 재전유된 기표가 된다. 어쩌면 죽음은 가난이라는 물리적 이유도 있지만, 불합리한 신분 구도와 절합된 평면에서 고찰되는 것이다.


     망각된 사회 시스템의 부조리 속 삶이 분노로 드러나며, 성스럽고 은밀하게만 접근되며 실상 접근할 수 없는 기호인 희생물로서 그 가정과 자연사적 죽음 너머 잉여의 욕망과 죽음의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반면 로사의 죽음은 비극으로, 마을의 또 다른 상징적 죽음의 분기점이 된다. 그녀의 죽음이 말 못하는 그녀의 특징에 결부되는 것에서, 나아가 이제 그 말 못하는 말을 하기 위해 숨조차 쉴 수 없는 극한의 상황에서 어떤 그녀에게 부여된 상상적 시선들은 사라지고, 더군다나 이미 그 희생물의 잉여적 고통의 순간에 또 다시 말 못함의 결여를 영원히 단락시키는 죽임으로써 구원을 내리고, 마지막으로 충격에 휩싸인 채 모두가 떠나고 그 희생물의 죽음의 효과가 상상의 그녀가 아닌 실제의 그녀에게 전이됨을 보았으므로, 죽지 않았음으로 로사를 부르며 이상향 그 자체로 그리워하는 과거의 기억을 접붙임으로써 천보(지춘성)는 이 상상과 실제의 시차를 영원한 평행선의 시차로 벌려 그 불가능한 결락의 허망함을 확인하는 것이다.


    ‘막심, 인간이 불쌍하다’



     이 죽음의 세 가지 전이와 효과는 최막심의 삶을 뒤틀리게 한다. 그는 그저 ‘인간이 불쌍하다’ 말하는데, 이는 사회 시스템을 전제한 것이지만 전적으로 그것에 예속된 것으로 상정하지 않는 독특한 그의 세계관을 또한 의미한다.


     곧 인간은 죄가 없고, 그 모든 역사‧사회적 흐름에 예속된 인간의 선택이 개체적이며 결과적으로 누구의 탓으로도 돌릴 수 없는 지나간 한 순간이었음을 이야기한다. 그는 그에 따라 ‘죄의식’도 ‘후회’도 없고, 단지 결과적으로 연약한 삶의 인간을 긍정할 뿐이다. 


    연극에서 그가 서술자의 지위를 점하고 인물들의 매개자적 위치에서 유유자적함은 그의 초월적이고 관조적인 삶의 시선을 연극 규칙의 메타적이고 또한 내용적인 측면에서 가능케 하는 것인데, 마치 범부의 삶을 이탈해 삶에 전적으로 혼자만 얽매이지 않는 듯한 느낌을 선사한다.


    진리의 이념을 넘어



     별과 자연의 언어는 곧 상형문자는 막심에게 ‘읽을 수 없는 기호’가 되는데, 곧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의 문제, 삶과 죽음의 시작과 끝의 형이상학적 불가능성의 질문을 하며 낭만적으로 그것을 전유하되, 낭만 자체를 즐기는 대신 그것을 언어(책)의 영역에 둘 뿐이다. 그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책을 읽어도 답을 못 내린 김이문은 단지 그것이 미망임을 전하며 대답을 회피하고, 결과적으로 스스로 지식인으로서 무능함을 드러낸다. 마치 이는 말년의 파우스트 박사의 허망함의 국면, 그리고 이미 그것을 너머 삶의 새로움을 추구하는 또 다른 모습에, 막심의 모습이 겹친다. 


    이미 막심은 지의 매개와 그 진리 앞에 도달함의 지난한 과정을 생략한 채 이미 파우스트 박사의 이상향을 선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전쟁의 화염 앞에서 춤추기, 빨간 무대 구조물이 드디어 화염의 온전함 지핌의 승화로 거듭나고 막심의 심장으로 체현될 때 인생의 절망‧비극은 가장 불가능하고 미약한 의지의 기쁨으로 전도된다.


     이러한 삶 속의 아포리아는 전쟁을 긍정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으며 전쟁과 상관없이 삶(의 순간)을 긍정함을 의미한다. 오로지 그 긍정으로써만 그는 삶의 초극적 주체가 된다. ‘대지를 마음껏 착취하며’.


    막심, 삶의 영원한 전언



     최막심에게 평소 ‘회춘’이라는 카드는 꽤 중요한데, 순간을 따르는 그가 정신적으로 늙지 않음은 마치 불로장생의 기표를 응당 자연스럽게 사용 가능한 위치에서 그것을 지시하며 튀어나온 것으로 비춰진다.


    그런 막심의 죽음은 진리의 공명으로 다가오는데, 김이문이라는 제3자의 신체를 거쳐 우리에게 직접 온다. 이는 최막심이 어떤 이상의 한 효과 차원이며, 인위적인 메시지의 지지물 기능을 함을 의미한다. 반면 최막심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살아 있게 하자 그의 영원한 젊음을 그가 꿈꾼 것과 상상적으로 일치시키며 그의 실제적인 죽음 자체를 은폐하는 것이다. 아니 망각하는 것이다. 


    죽음은 그러고 보면 단지 수용되고 선택될 뿐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곧 죽음은 영원한 가능성의 또 다른 세계일 수 있음을 최막심은 그의 상상적 유언, 그리고 김이문의 상상적 매개를 통해 목소리의 영원함으로 그 죽음의 결락을 상상적으로 봉합한다고나 할까.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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