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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 <소년이 그랬다>: '전도된 기호로 사회 균열을 드러내다'
    REVIEW/Theater 2013. 5. 22. 10:53

    무대: 외부성의 표지


    ▲ 5월 16일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열린 소년이그랬다(작. 톰 라이코스&스테포 난쑤 / 극본. 한현주 / 연출. 남인우) 프레스 리허설 (이하 상동)


    양옆의 거대한 구조물로 버티고 있는 무대는 들락날락하는 공간으로서, 객석을 거대하게 관통하는 ‘텅 빈 중앙’ 그 자체로 존재하게 된다. 배우들은 두 개의 막을 교차해서 연기하고 이 끝으로부터의 시작을 야기한다. 배우들이 그 양 옆의 통로를 통과할 때 관객의 시선의 중심을 이탈하게 하며 외부성을 그대로 가져간다. 


    두 배우는 사건의 재현적으로 진행되어 가는 과정을 변용의 지점들로 가파르게 그려내고, 이는 한편 무대 양옆으로 이분되어 오가면서 ‘심리의 내러티브’로 드러난다.


    한편 이 ‘외부성’은 객석 중앙을 통과하며 관객의 집중을 다시금 분열시키면서 또 다른 외부성이 된다. 전자의 외부성이 현 순간에서 멀어지며 또한 또 다른 시작 지점을 예시하는 것이라면, 후자의 외부성은 우연성과 돌발적인 것으로서 시간의 서사 흐름을 균열 내고 순간 인식케 하고 또한 또 다른 시작점으로의 끝을 상정한다. 


    이 끝을 기호를 감싸고 있는 무대 자체 내 고정된 기호, “안전하고 튼튼하게 짓겠습니다”는 이 건축물 자체에 대한 극 내용의 배경적 지표이자 그 속의 현실 자체로 기능하고 또한 이 청소년들에 대해 작용하게 억압적인 교육의 제도 자체를 넌지시 암시한다.


    소년들의 "짭새"라는 용어는 통상의 사회가 그들에게는 하나의 외부이며, 이러한 용어 규정에 따라 경찰과 그것이 사회적으로 가리키는 바를 세계 내에서 그 자체로 재배치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무대를 점령하는 연주와 조명



    기타는 라이브로 연주되고 그것을 투명한 막으로 막은 가운데, 배우의 연기의 어떤 고양된 순간과 함께 하는 정동(affect)으로 작용한다. 이는 거의 마치 무성영화의 연주 실행을 상기시킨다. 조명을 통한 어둠으로의 전환은 일단의 연기 변전(이는 두 배우가 소년 둘과 경찰 둘이라는 주요 두 가지 역할을 특별한 이음매의 표지 없이 수행함을 의미한다)의 수행성 지표로 기능한다. 


    “바람도 안 불어~”에서 연주는 극대화되며 어둠의 정점을 찍는데 기타의 자취는 끝나지 않는다. 이는 어둠 속에 소리가 중심적인 위치를 점하는 일정한 끝은 아직 없다는 식으로 끈을 연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듯하다.


    순간적으로 조명은 음악적으로 나타나는데, 무대는 분열증적으로 분할된 프레임의 부분들로 일어나는 것이다. 또 객석을 넘나들고 넘치는 부분으로 있는 이 ‘거대한 무대’를 살아 있는 것으로서 만들기 위한다는 듯 그리고 무엇보다 이 역동적인 무대에 부응하기 위해 속도감 있게 분산되며 무대를 채운다.


    또 다른 조명 활용의 예는 재판에서 “탕” 두드리는 이러한 조명이 한 단계씩 밝아지는 부분인데, 이러한 조명은 무대 전체를 뒤덮는 거시적인 것이면서 또한 수행적인 미학적 기호로 작용한다. 


    연기의 수행적 장치



    두 배우가 소년과 경찰을 모두 연기하는데, 소년에서 경찰로 그리고 경찰에서 소년으로 역할을 변신함은 무대라는 공간의 장르적 규약에 일부이지만, 사회적으로 ‘역할’이 지정되어 있음을 메타적으로 지시하는 것이다. 


    이는 역으로 의기양양하게 자유를 누비던 ‘가해자’에서 심문을 받는 입장의 청소년이라는 일순간 약자가 된 소년들의 전도된 자리를 만드는 심판자-경찰로 동시적으로 변함은 피해자-심판자의 위치를 메타적으로 두 가지가 일치하며(‘역할은 단지 표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다시 연기의 수행에 의한 것임으로 소급된다. 곧 역할의 전도와 역할의 사회적 지정의 의미는 연극이라는 규약 속에서 상정될 수 있는 부분인 것이다.


    일종의 피해자와 처벌하는 자의 분리된 간극의 인위적인 사회의 자리, 그러나 극히 자유로운 연극이라는 제도 안에서의 보이지 않는 규칙이 의미적으로도 또한 형식적으로도 절합되는 부분인 것이다. 


    '애초에 이유 따위는 없는' 삶의 아포리아



    “그늘이 싫었다!”는 내러티브이자 현재적 발화인, 동시에 과거의 것이기도 한데, 이들이 벌인 일들의 동기는 파악할 수도 없고 제대로 해명되지 않는다. ‘뜀의 이유가 없어졌다’는 소년은 이제 자유롭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대신,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또한 끊임없이 되돌아가야 하는 그런 지점에 봉착했음을 가리킨다. 이제 지속된 뜀을 포기하고 정체된 채 있거나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더 빨리 뛸 이유를 만들게 될’지도 모른다.


    이는 결국 두 명제 모두 어차피 달려야 할 이유 자체에 대한 예시는 없고, ‘이유’에 대한 탐색 없이 삶을 구가해야 함을 의미한다. 애초 ‘이유’는 불명확했고 또 찾는 것조차 포기되는 시점에 놓인 것이다.


    삶의 외부로서, 이들을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삶 자체를 그저 망망대해 평원으로 뛰어가는 것 자체가 막막했던 것에서 어떤 트라우마로서 ‘홈 패인 공간’을 망각‧은폐한 채 달려 나가야 함(사실 달려 나갈 수 없음)을 의미한다. 곧 이러한 기억은 사후 누빔점으로 삶을 재구성하는 측면으로 기능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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