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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환경영화제 개막작] 프라미스드 랜드(Promised Land, 2012) 리뷰
    카테고리 없음 2013. 5. 13. 22:02

    '개발의 논리'와 '보전의 논리' 사이에서


    ▲ 스티브 버틀러 역 맷 데이먼, 프라미스드 랜드(Promised Land, 2012) 스틸 [사진 제공=서울환경영화제 홍보팀]


    10회 서울환경영화제의 개막작 프라미스드 랜드(Promised Land, 2012)는 환경 개발을 설득하기 위해 작은 시골 마을에 불시착한 ‘글로벌(Global)’ 직원 스티브 버틀러(맷 데이먼)가 좌충우돌의 사건들을 겪는 과정을 자연을 배경으로 자연스럽게 한 편의 드라마로 엮어내며 감동을 끌어내는 수작이다.


    환경과 관련해 ‘개발을 하면 더 나은 삶이 주어진다’는 명제는 조건과 그 결과에 각각 이중의 의미를 전제하고 있다.


    우선 그 조건에서 ‘개발에 따른 환경의 파괴인가?’, 아니면 ‘더 나은 환경을 위해 일시적인 파괴는 감수할 수밖에 없느냐?’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대립된 시각의 차이를 낳고 있다면, 그 결과로서 ‘더 나은 삶’이란 ‘자연과 벗 삼아 소박하고 평온한 삶을 유지하는 것인가?’, 아니면 ‘물질적인 자본의 혜택 속에 더 편리한 삶을 사는 게 좋은 것인가?’의 시각차가 발생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초기에는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진지한 몇몇 순간들을 던지는데, 바로 물질적으로 풍족하지 않지만 가업을 대부분 이어 나가며 자연으로부터 삶의 조건을 만들어내는 소박한 삶을 영위하는 주민들의 모습과 함께 그들을 설득하는 데서 처음부터 좌초에 빠진 스티브의 고민이 관객에게도 전이된다.


    보통의 영화상의 공식은 주인공이 실패에서 성공을 이끌어 내는 게 주요 서사의 축을 형성하는 게 상식이므로, 주인공의 간난고초를 다소 불편하게 바라보면서도 주인공이 자신의 꿈을 이룰 것이라는 전제 하에, 과연 이 개발이 환경에 전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언저리를 맴돌 수밖에 없다.


    과학의 논리에 숨겨진 '신념'의 문제



    ▲ 프랭크 예이츠(할 홀브룩), 프라미스드 랜드(Promised Land, 2012) 스틸 [사진 제공=서울환경영화제 홍보팀]


    스티브는 처음에 이 가스 개발 사업에 관한 간략한 설명을 통해 주민들을 간단하게 설득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자리에 엄청난 지성의 교사 프랭크 예이츠(할 홀브룩)가 여러 반박의 증거 제시와 함께 현장에서의 주민들의 동조를 이끌어 내어 투표로까지 문제가 부쳐지게 된다. 본인도 시골 태생이고, 시골들을 돌며 개발에 대한 설득 작업의 선두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쳐 오던 가운데 스티브는 첫 번째 예기치 못한 좌초를 만난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개발 반대의 논리에 그 역시 진실의 문제에 대한 깊숙한 추궁의 자리에 몰리게 된다는 점인데, 그 역시 땅을 깊숙이 파는 시추(試錐) 작업이 성공해 가스가 나오고, 이로써 일종의 핵에너지를 대체하여 인류 문명의 대체 에너지원의 성공적인 개발 및 화석연료의 폐해를 줄일 수 있음의 가능성을 완전히 확신하지 못한다는 것을 시인하게 된다. 그는 주민 한 명에게 시추 성공 확률을 오십 퍼센트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 역시 이 시추 과정 쉽게 말해 토지에 깊숙한 구멍을 뚫어 자연을 우선 파괴시키는 것이 환경에 진정 피해가 되지 않을 것인지에 대한 ‘확신’은 없다. 그리고 이는 누구도 자신해서 그것을 말할 수 없는 문제이다. 다만 개발에 대해 신중한 태도로 임하는 자세는 결과적으로 하나의 온전한 신념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게 사실일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문제의 근본적인 성질이 신념(감성)과 과학(논리)의 문제에서 애매한 경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추 성공률이 설사 팔십 퍼센트, 구십 퍼센트를 상회하더라도 백 퍼센트를 채우지 못하는 나머지의 가능성을 무시하는 게 진정한 과학적 논리라 말할 순 없다. 과학은 단지 수치를 제공할 뿐이다. 과학적으로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과학의 논리와는 상관없이 매우 중요한 부분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이 개발과 발전을 뒷받침하는 과학의 논리라는 것은 단지 결코 전부가 아닌 인간의 입장만이 반영된 결과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 높은 가능성을 믿는 게 과학적’이라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에는 마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과학의 논리를 무시하는 어리석은 인간들인 것 같은 매도의 논리를 낳기도 한다. 이는 지난 정부의 ‘소고기 사태’나 ‘4대강 사업’과 같은 경우에서 대다수의 신념의 문제를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취급하고, 과학의 논리를 들어 발전을 감행한 사례를 생각하게끔 한다.


    마치 과학은 완전하고 그 수치의 가능성 자체를 인식해야 된다가 아닌, 믿어야 된다는 논리가 그 안에 있다. 결과적으로 이 과학의 논리 역시 진정 객관적인 진릿값 그 자체로 적용되기보다 활용되고 주장을 뒷받침하는 일종의 현혹의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과학철학자로 분류되는 혁신적인 학문의 장을 만든 것으로 평가되는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는 이러한 과학 이면에 담긴 인간의 정치적‧사회적 입장의 반영에 대해 주의할 것을 당부한다. 참고로 그의 책 중에 최근에 출간된 『브뤼노 라투르의 과학인문학 편지』는 매우 쉽게 그의 사상이 편지 형식으로 쓰여 있어 일독을 권한다.


    개발 이전에 설득을 통해 우선 자신의 위치에서의 성과를 달성하고자 하는 차원에서 스티브 역시 환경을 파괴하자는 입장은 전혀 아니다. 그가 단지 그러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는 개발에 대한 주민들의 동의를 이끌어 내고자 하는 것이다.


    '반전에 반전을 더하다'



    ▲ 스티브 버틀러 역 맷 데이먼, 프라미스드 랜드(Promised Land, 2012) 스틸 [사진 제공=서울환경영화제 홍보팀]


    영화는 후반부에 이르러 이 꼬인 그의 일상에 갑작스레 개발이 이뤄질 수 있는 중요한 반전의 기회가 생겨난다. 이는 곧 이어 또 다른 반전으로 가는 입구로, 중요한 시놉시스의 부분이라 밝힐 순 없지만, 이를 통해 마치 스티브가 받은 일시적인 기쁨과 또 다른 충격이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이되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맷 데이먼’이라는 배우가 참 좋은 배우라는 사실과 이 거대한 자연에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별 의도 없이 흘려보내듯 잡는 카메라의 시선을 선택한 감독의 탁월한 안목을 영화의 후반에 이르러 새삼 깨닫게 된다.


    곧 마지막 또 다른 반전인 스티브의 주민들을 향한 감동적 연설이 기다리고 있다. 미래 인류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개발을 감행하는 대신 지금 그것을 투박하게 유지할 뿐인, 어찌 보면 미온적인 선택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영화의 결말은 영화를 넘어 우리가 반드시 깊게 사유해야 할 문제가 아닐까.


    개발과 정체, 자연과 문명의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 말이다.


    2013 서울환경영화제의 개막작은 두 번의 반전을 통해 예상 못할 감동을 선사했다. 그리고 이 반전은 치밀한 영화적 구성에 대한 것 이전에, 진정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예시했다는 데서 영화 너머 찾아오는 감동이 아니었을까. 사실상 결말에는 스티브의 선택에 따른 이유를 제시하는, 또 다른 반전이 관객을 기다린다. 


    2013 서울환경영화제 측은 기자회견에서 본 영화제가 결코 환경에 관한 의식을 제고하고, 실천의 당위성으로 귀결되는 따분한 다큐멘터리들로 이뤄지지 않았음을 언급한 바 있다. 이미 ‘환경’이 우리 삶의 조건 그 자체임을 사유할 수 있다면, ‘환경’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삶의 모습이 그것과 연관되어 그려질 수 있음은 물론이기 때문이다. 이 위트 있고 감동적인 영화처럼 16일까지 며칠 남지 않은 영화제의 작품들을 살펴보는 것은 현명한 선택일 것 같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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