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준 2013.01.01 13:27

무대 위의 무대 
 

▲ 고선웅 연출, 연극 <리어외전> 공연 사진 [사진 제공=LG아트센터]

무대 위에 무대가 놓여 있다. 이는 단순히는 삶은 하나의 무대라는 은유를 드러낸 것이다. 여기에 통상의 프로시니엄아치가 빈 공간의 형식으로서 재현을 은폐하고 있는 것 대신에, 해체가 가능한 임시 구조물 형태라는 이중의 무대를 통해 기존의 재현 구조의 도식을 공공연히 (메타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메타적 극 반영은 가령 코러스장이 컷 하며 영화의 ‘찍고 있음’, ‘촬영되고 있음’을 명시할 때 미미하게 이어진다.

이중의 무대로 얻어지는 리어왕의 해체 공식에 짧게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의 비극적 운명의 법칙을 비디오 타입의 빨리 감기 버전 아래 극중극 형식으로 치환한다. 그리고 이것을 재구성하기 전략의 빌미로 제공한다. 엄밀히 말하면 극중극은 아닌데, <리어외전>이 『리어왕』을 해체적 전략 아래 메타 차원으로 접근하려는 원작의 무게 덜기의 의도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조금 더 엄밀하게는 『리어왕』의 스테레오타입화된 이미지 기억을 공유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 리어왕을 보여줄 것임을 포함한다, 다른 방식으로써 말이다.

코러스의 ‘무대 위 세움’(이미 무대는 환영적임을, 재현되고 있음을 표명하고 있는 가운데, 코러스의 무대 위 등장은 어떤 주체로 이들을 놓는 효과를 가진다)은 마치 껍질을 벗겨내는 연쇄 작용을 벌인다. 이 말의 작용은 무대의 커튼을 걷듯이 빠르게 끊고 또 이어진다. 이제 <리어외전>이라는 쇼가 본격적으로 가동된다.

말의 허무한 권능을 대체하는 방식

이 무대의 바깥 주변부는 왕이 노동자가 된 시점에서 환영의 반대편에서 (오로지 이것이 환영이라는 전제 하에서) 실재(계)로 드러난다(이중의 무대가 일종의 재현 도식의 상상계라면). 영토를 가진 왕의 권능은 땅을 나눈다는 수행문을 통해 이 영토가 말에 의해 분배되었음을 의미하는 순간, 소멸되고 만다. 왕은 (자신의, 이어 딸들의, 마지막으로 셋째 딸의) 말을 우선시했지만, 말은 언제까지나 그 힘과 진실을 담보하지 못했다.

자신의 순수한 첫째 아들 에드거 대신 간악한 둘째 아들 에드먼드의 말에 휘둘리며 삶의 파멸을 맞는 복제된 리어왕격인 글로스터를 두고 빠르게 넘어가는 시적 서술은 여러 문장으로 연쇄되나 대강 이런 식이다. ‘보았으나 보지 않았다’의 부인에서 ‘보여줘도 못 본다’는 망각과 무지의 단계로 넘어가는 일련의 의식 구조. 이는 글로스터뿐만 아니라 ‘말은 곧 진실이다’라는 왕의 허구적인 믿음의 허무한 두께를 이중으로 표시하며 극 전반의 중요한 테제로 드러난다.

말은 일종의 물신이다. 말은 곧 왕의 땅을 얻으려는 딸들은 무한한 치장으로 자신의 땅만을 갖고자 하는 욕망을 은폐한다(그럼으로써 확연히 드러낸다). 마치 광고의 물신적 성격을 셰익스피어는 이미 내다보고 있다고나 할까. 이 왕의 무한한 권능, 그래서 사실 그 안에 어떤 실재도 없는 왕의 권위는 주변부 주체로서 땅으로 내려가 리어카를 끄는 노동의 시간이 축적된 이후에야 진정한 왕이 된다(그러한 역전을 통한 초월 구조를 <리어외전>은 새롭게 구성해 내고 있다). 말로써 가능한 지위가 아닌, 땀과 육체 근육의 단단해짐으로 인해 실질적으로 획득되는 지위.

실재의 순간, 보이는 대신 들리는 것들

이 말들의 뒤덮임이라는, 대략 진실을 숨기는 셰익스피어적 주제의식으로서의 말의 성격과 '빠른 속도의 말의 치환이라는 무대 (신체적 성격의) 언어'를 만드는 고선웅식 연극의 성격에서 유래하는 떠들썩한 말의 성찬 역시 정적을 맞는 순간이 있다.

<리어외전> 속에서 주변부 내지 빈민의 왕 노릇을 하는 왕고의 목발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그것이다. 왕고의 목발은 그의 말 뒤로 뒤따른다. 잉여로서. 곧 목발은 그가 무너진 왕 앞에서 왕의 지위를 가진 자로서의 역량을 그 상징적 기호로서 드러내면서 동시에 그가 의존해야 하는 유약한 신체의 해소될 수 없는 문제를 남긴다. 삶의 권능과 죽음으로서 덧없는 삶을 시간차로 그린다. 반면 그가 다시 무대 아래에서 사라질 때는 목발과 그의 말은 일치한다. 이어 빠른 발걸음에 목발 소리는 그를 앞서기 시작한다. 이는 의도된 것일까. 지나치게 세심하고 예리한 순간이다. 어쨌거나 목발은 실재계에서 다시 상징계로 떨어진다.

반면 왕고의 (말의) 공격에 왕은 자신의 피폐한 처지를 인정해야만 하는 순간에 직면한다. 하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 무너진 내지 무화된 권위를 오로지 의지로 채우며 굳어진 빈 신체가 된 것이다. 이 ‘의지의 목발’은 무형으로 그를 지탱한다. 하지만 이 순간 단지 말로써만 가능했던 왕(왕의 권위는 이미 주어진 것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은 이 말 없는 버팀으로 인해 다시 왕으로 도약할 전환의 순간을 가져간다.

이성의 이면에서

왕은 거북이를 리어카에 태우고 주변부를 떠돈다. 마치 환영의 무대 위 무대의 시간을 돌리는 시곗바늘의 은유와도 같다. 이 시간은 죽음을 향해 있다. 곧 모든 것은 유한하고도 덧없다는 것. 더군다나 욕망과 사기로 점철된 무대 위 주체들은.

왕의 독백 ‘왔던 길이 안 보인다. 꿈길인가’와 조용필의 ‘허공’에서 “꿈이었다고……”의 차용은 눈 먼 왕을 각각 환유적으로, 그리고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전자는 진짜 왕이 글로스터처럼 앞을 볼 수 없다는 것(이는 나중에 드러난다)과 상관관계가 있고, 후자는 인생은 꿈이라는(꿈 같은 것이라는) 비유를 그리기 위해 대중가요 형식을 차용하며, 허망한 말의 표피에 눈이 멀었던 왕의 후회로 연결된다.

이러한 낭만적 페티시즘 내지는 허무한 의고주의 가운데, 왕은 뜬금없이 왜 말없는 거북이에게 삶을 인식시키려는 것일까. 왕의 독백은 이 거북이의 말없음에 사라지고 만다. 거북이의 시선은 이것들을 무화시키는 것이다. 코러스장이 갖는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표상되는 극 외부적 지위보다 오히려 멍한 거북이의 시선은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하는 객관자의 시점에 더 가깝다. 가령 거북이는 보지 못한 것을 보고, 듣지 못한 것을 듣는 존재이다.

치킨하우스, 눈깔

닭과 인간의 먹이사슬 관계, 그러한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이 치킨이란 일종의 상품으로 은폐된 집에서 닭털 뽑힌 신세가 된 내복 입은 왕은 사실 눈이 멀었다(멀어 있었다). 글로스터는 눈깔이 뽑힌다. 왕의 현실에서 망각되고 은폐된 장소로의 방랑적 삶의 그 추락을 치킨하우스로 비유한 극의 흐름을 따르자면, 극에는 눈깔사탕을 빠는 그의 딸 리건이 등장할 만도 하다.

눈이 뽑히는 순간, 빨간 눈깔이 무대 상수에 떨어지는 것, 이어 보이지 않는 자 대신 ‘눈깔 없는 사내’로 글로스터가 비유되는 것은 일종의 시각에 초점이 맞춰진 서구 세계관의 질서는 물질적인 환유로 재전유되는 측면으로 보인다. 보지 못함이 세계를 가지지 못함, 지배하지 못함을 표상하는 대신, 신체의 일부, 곧 물질이라는 것 정도로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에 물론 그 추락의 단두대 소리와의 등가, 또한 권위 내지 삶의 은유 역시 작동한다.

처단

리어왕은 노동으로 다시 살아난 권능으로, 의지의 총구로 모두를 쏘아 죽인다. 다시 일어선 왕의 권능이 증명되는 순간이므로, 또한 말의 속도와 같이 빠른 속도의 죽임이 갖는 찰나적 마찰이기에 이는 유희적인 동시에 희극적이다.

왕은 정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소거한다. 왕에게서 자신을 찾으라는 딸의 말은 환영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이 말은 어쩌면 왕에게 있어 하나의 정언명령이 되었던 것일까. 왕은 말로써 누비는 세계의 지배는 시각이 멀고 나서 온전한 세계를 잃는 대신, 의지의 신체를 얻는다. 이 왕에게서 들리지 않았던 진실이 딸의 말로서가 아닌 스스로로부터 거듭나는 것이다.

왕의 이름을 되찾은 왕의 죽임은 욕망에 ‘눈 먼’ 이들에 대한 정당한 응징인가. 아님 노동자의 집권과 타락한 왕권 사이 계급적 전복이 일어난 것으로 봐야 하는가. 말을 꾸밀 줄 몰랐던, 그럼에도 말 없는 말을 끝까지 표현하려 했던 비극적 운명의 시작점인 셋째 딸 코딜리어(이경미 배우)의 목소리는 히스테리로 일관된다(매우 단일한 톤이다).

욕망을 무대 위 무대에서 환영으로 표상하며, 이 환영을 거꾸로 돌리던(시계 반대 방향으로) 왕과 셋째 딸은 처음 왕의 딸을 향한 극진한 마음 이후로 직접적인 만남이 사라진다. 이 셋째 딸을 지움으로써 효의 드라마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대신, 오히려 계급적 서사 속에 현실의 참 면목을 보여주는 것으로 나아가려 했던 것은 아닐까.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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