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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뮤지컬 <모비딕> 리뷰 : '뮤지컬, 음악극으로서 외연을 확장하다'
    REVIEW/Musical 2012. 5. 2. 09:00

    음악-공간으로서 <모비딕>의 무대

    ▲ 지난 3월 20일, 서울 종로구 소재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열린 뮤지컬 <모비딕> 프레스콜 현장

    경사진 무대는 조명이 켜지기 전까지는 심하게 압축되어 있는 모습이다. 피아노와 조응하며 신체에서부터 출현하는 노래가 아닌,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로 치환된다. 보이지 않는 스피커는 공간으로 소리를 향하게 하고 또 그 공간으로부터의 소리를 도출한다. 가령 황홀경(ekstasis)은 “밖에ek 서 있다stasis”이다. 사이렌의 소리는 외부에서 들려온다.

    네레이드는 그런 의미에서 무대의 경계에서 그 무대를 확장하는 민감한 존재이자 사이렌 상징을 그대로 잇고 있다. 중요한 건 이 소리가 내가 들어야만 하는 것이 아닌 나에게로 들려온다는 것이다.

    악기들을 든 저마다의 인물들은 각 개성을 상정하는 한편 오케스트라의 양상을 띠며 이 기억과 환영의 장소에 합치되기 위해 그 출현에서 시간 속에서 정지된 모습을 보인다. 정지는 이 속에서 생명의 탄생과 죽음이 결부된 영원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이 음악들의 쓰임은 매우 분명하다. 그로부터 연유하는 목소리, 이곳은 음악 장field이 된다. 압축된 공간과 소리를 내는 존재자, 소리가 출현하는 공간 여기에 연주를 하며 노래를 완성하는 음과 신체가 연주자-배우의 한 사람에 의해 완성됨이 더해지며 <모비딕>의 음악 공간, 신비한 세계가 만들어진다.

    음악은 이 공간을 엮고 외화면으로 이 환영의 화면에 삽입된다. 뮤지컬은 영화와는 다른 장르이지만 <모비딕>에서는 음악이 악단석 음악보다는 외화면적 음향과 같은 영화적 장치로 세계의 평면을 벌리고 음악 전환과 새로움을 낳는 것이다.
    압축된 공간은 일종의 공명판의 기능을 하고 스피커가 증폭시키는 소리가 그 안에 모아진다.

    이스마엘과 퀴퀘그 간 사랑의 기호

    ▲ 지난 3월 20일, 서울 종로구 소재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열린 뮤지컬 <모비딕> 프레스콜 현장, 퀴퀘그 역의 지현준(사진 오른쪽), 이스마엘 역의 신지호

    내레이션과 방백의 경계에서, 화자와 변사 같은 서술자의 경계에서 <모비딕> 전체의 화자 내지는 의식으로서 이스마엘이 있다(그 반대쪽에는 무의식의 네레이드가 있다).

    야생이 묻어나는, 이국적인 신비를 간직한 퀴퀘그가 첫 등장하고, 소통이 가능한 대신 일방적인 거리의 바라봄만이 성립할 것 같던 그의 행위가 실재가 되며 스스로 주체가 되어 존재하게 될 때는 담배연기를 이스마엘을 향해 뿜어내는 공백의 신이다.

    공백은 또한 소리의 공백이 빚어지는 순간이기도 한데, 이 행위는 오로지 이스마엘을 향한 것임을 뜻하기 때문이다. 곧 이스마엘이라는 의식의 주체를 지우고 퀴퀘그의 내면세계의 평면을 조직하게 되는 것, 동시에 그(이스마엘)가 그저 하나의 존재자에서 의미로서 열리게 되는 것이다. 이후 둘은 친구가 된다.

    이 관계의 교류에서 퀴퀘그의 어법을 따라 ‘이름’은 절대적이고 실재적인 자리를 가지게 된다. 그의 말투를 포괄하는 전체적인 화법은 문장을 만드는 게 아니라, 곧 접속사를 사용하는 게 아닌 단어들을 나열해 뜻을 전달하는 것으로 단어 하나 마다에 그 고유의 의미가 담기게 된다. 소쉬르의 기호가 성립하는 자의성은 여기서 성립하지 않는다. 퀴퀘그라는 이름은 퀴퀘그 그 자체인 셈, 곧 관계는 사용 가치가 아닌 교환 가치를 따른다. 일종의 단어들의 교환은 기호 나눔인 셈이고 둘의 풍부한 사랑의 기호들을 낳는 것으로 이어진다.

    <모비딕>의 음악적 양상

    ▲ 지난 3월 20일, 서울 종로구 소재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열린 뮤지컬 <모비딕> 프레스콜 현장, 퀴퀘그 역의 지현준(사진 왼쪽 상단), 이스마엘 역의 신지호

    <모비딕>은 음악을 따르는 것이라기보다 엄밀히 악기를 따르는데 어느 순간 뮤지컬과 콘서트라는 경계를 흐트러뜨린다고 보인다. 콘서트 형식은 뮤지컬에 외삽된 측면을 띠고 뮤지컬은 그로 인해 그 경계를 확장한다.

    음악이 갖는 음악-공간의 탄생에서 존재자들(정지된 등장인물들)이 빛을 받아 현실의 평면을 만들 때 극은 소극적 양상의 장르적 변용의 양상을 보인다. 여기서 무대는 하나의 공간에서 무대로 자리를 옮기고 관객의 참여를 유도해 내게 된다. 이러한 부분은 전체적으로 내재적인 성격의 <모비딕>에 외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관객 참여 일으키는 장르적 쓰임들은 어떤 상투적인 것이자 외재적인 것이다. 닮은 것들, 유사성의 계열들을 접합시키는 것으로, 이는 관객과 손잡는 쉽지만 필연적인 전략이다. 이와 같은 부분은 관객 참여에 쉽게 응하지 않거나 작위적인 즐거움에 동조하지 않는 관객으로서는 부수적인 요인으로 인식된다.

    <모비딕>에 대한 신비는 공간 한 쪽에 자리 잡게 되는데 네레이드의 소리가 외부의 환영으로 있는 가운데 청점聽點이 퀴퀘그의 그녀를 향해 있음으로 고정되기 때문이다.

    이스마엘 역의 배우 신지호는 음악 연주자로서 정체성을 극 바깥과 극 안에서 순일하게 유지하는데, 이는 피아노 음악에 다른 수행의 의미가 이 음악과 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연주의 즐거움은 즐거움의 연기의 진정성을 담보하는 것이다.

    고래를 잡는 행위는 가장 숭고한 행위의 승화로 변한다. 이스마엘의 노래는 일반적인 뮤지컬에서의 일종의 진정성을 절취한 선분으로서의 그 자체가 연기가 아닌 영화적 장면들에 라이브 음악이 삽입되는 형국인데, 배우 신지호의 가창력에 대한 집중적 포화의 비판적 의견들은 다른 차원에서 해석의 지점을 찾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곧 <모비딕>의 뮤지컬적 측면보다 음악극의 측면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 지난 3월 20일, 서울 종로구 소재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열린 뮤지컬 <모비딕> 프레스콜 현장, 퀴퀘그 역의 지현준

    진취적 측면의 느낌이 드는 부분은 퀴퀘그의 노래에 평행선상으로 피아노가 달리고 조화가 성립되는 측면이다. 진정성의 징후가 드러나는 부분은 퀴퀘그의 아마도 고래라는 이름의 노래를 부르며 음악적 조율 이전에 그의 목소리가 거칠게 드러나는 부분이자 한편으로 퀴퀘그를 바라보며 피아노를 치는 이스마엘의 눈빛이다.

    이 같은 관계의 은근한 평면이 시선이 함축하는 바에 의한 것이다. 이스마엘의 말은 무자비한 바다를 겪으며 내지는 사랑의 기호들에 감싸이는 부분에서 일기이자 시로서의 노래 이전에 하나의 목소리로 출현하게 된다.

    중간적·매개적 존재, 네레이드

     

    ▲ 지난 3월 20일, 서울 종로구 소재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열린 뮤지컬 <모비딕> 프레스콜 현장, 네레이드 역의 이지영

    음악적 스펙터클은 하모니의 확장으로 나타나고, 네레이드에 의해 부과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안을 향한 경사에서의 버팀, 조명의 남겨짐에 의해.

    네레이드는 <모비딕>에서 외부의 내부인 셈으로 신기한 존재이다.
    네레이드는 무뚝뚝하고 남성적으로만 보이던 퀴퀘그의 모태적 장소이자 그 자체의 여성성이기도 하다. 여기서 빛과 어둠의 대비는 퀴퀘그의 환영의 주파수로서 빛의 네레이드의 청아함의 목소리가 거친 목소리의 퀴퀘그의 표면과 중층되며 나타난다.

    네레이드는 바다의 어둠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내지는 담고 있는 장소에서, 또 퀴퀘그는 바다를 극복하려는 의지적인 이상적인 인물의 부분에서부터 이 순간 전도된 평면으로 복합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빛과 어둠은 이처럼 <모비딕>에서 교차한다.

    고래 ‘모비딕’을 향한 삶의 여정

    ▲ 지난 3월 20일, 서울 종로구 소재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열린 뮤지컬 <모비딕> 프레스콜 현장, 스타벅 역의 이승현, 28일 공연에는 배우 유성재가 스타벅 역을 맡았다

    이들의 내면에는 공포와 두려움이 죽음을 향하고 있고 이는 다시 이 척박한 환경을 버티고 나아가려는 고래를 잡는 유인의 양면을 형성함을 알 수 있다. 고래 모비딕은 두려움이자 실은 죽음(을 주는 존재)이자 죽음을 극복하게 만드는 존재(고래와 싸워 이김으로써 또한 고래가 갖는 두려움에 대한 정신적인 승리를 가져감으로써)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죽음은 바다로의 심연으로 가라앉는 어떤 고난이 끝나는 길(프로이트의 죽음 충동)이기도 하다. 굳이 죽음에 대한 공포·두려움은 삶과 죽음의 대척적인 지점의 상정이고, 오히려 이 삶에 얽매임에서 벗어나 죽음의 항해를 하는 것이다. 즉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는 벗어나려 해도 귀환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를 벗어나는 선택한 이들에게 여기서 얻어지는 죽음에 이르는 항해와 모험은 그것을 극복하는 숭고함으로 변한다.

    표면적으로는 죽음의 환상성에 기울어져 있는 선장의 멈출 수 없는 집착이 <모비딕>을 향한 단 한 순간에 귀착되어 항해의 평면을 벌이는 것으로 나타나고, 이상과 현실의 대립 축을 낳으며 그 안에서 퀴퀘그의 어렸을 적 순수한 삶의 낙원에 당도하는 것은 시련으로 변해간다.

    한편 그의 죽음은 이 가혹한 바다가 낳는 인간의 나약함의 삶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죽음은 이스마엘의 그를 향한 사랑의 기호들이 더욱 발산됨을 의미하게 되는데, 죽음의 징후들이 그의 미약한 신체에서 묻어날 때 이스마엘의 심정은 더욱 간절해지는 한편, 다시 퀴퀘그의 연주하는 이의 몸짓으로, 이 음악으로 승화되어 나타나며 작품 안에서 잠재하는 음악의 한 부분으로서 생명이 되어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즉 그가 목소리의 일부로 무대에 동화된다는 것이다.

    끝을, 죽음을 향해...

    ▲ 지난 3월 20일, 서울 종로구 소재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열린 뮤지컬 <모비딕> 프레스콜 현장, 선장 에이헙 역의 배우 황건

    이 죽음의 징후부터 사랑의 징후로 해석이 풍부해지고, 역할에서 음악으로, 이야기에서 음악극의 예술로 향해 갈 때 다른 이들의 목소리도 더해진다. 각기 다른 욕망들에는 삶과 죽음이 만나는 바다에서 두려움과 그것의 극복이 자리하는 내면, 죽음으로 인한 사랑의 어긋남, 끝없이 돌아가는 과거에 대한 집착과 의지의 정념 사이에서 그에 반해 과거 평온한 삶과 안락함의 현실, 그리고 이들을 다시 일상으로 되돌리는 윤리적 선택 간의 모순적 간극들이 중첩되며 자리한다.

    모든 역할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뿜어내며 바다의 기호로 전가할 때 <모비딕>은 매우 상징적인 가치들이 오가는 복합적인 평면으로 변하게 된다.

    음악은 부조응, 불협화음, 파편적 질서의 흐트러짐으로 나아간다. 아들을 찾아 헤매는 모성이 드러난다. 선장의 광기는 공백을 관객 사이에서 만들어 내는데, 이해할 수 없는 그의 내면은 다시 이해받지 못하는 외로움의 그의 내면을 가리킨다.

    그는 이런 되돌이표의 의지적 표출의 발화를 늘 향하게 되고, 자신을 송두리째 이 기호에 분출시키고 만다. 그 내면은 공허하고 그 고독은 지나치다.

    커튼콜의 특별한 의미

    ▲ 지난 3월 20일, 서울 종로구 소재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열린 뮤지컬 <모비딕> 프레스콜 현장에서 커튼콜 장면, (사진 왼쪽부터) 선장 에이헙 역의 배우 황건, 이스마엘 역의 신지호, 퀴퀘그 역의 지현준(사진 오른쪽), 이스마엘 역의 윤한(더블캐스팅), 퀴케그 역의 KoN(더블캐스팅)

    마지막 공연의 전날 공연(28일 저녁 7시 공연), 실질적인 다섯 배우들의 마지막 공연에서의 커튼콜에서 이스마엘 역의 신지호는 역할로의 본분이 끝나기 전부터 이미 이 끝남의 징후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눈물이 솟고 있었다.

    우선 커튼콜은 현실과 분리되기보다 이 압축적 공간에서 해체되어 이 심연의 인간 운명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모두 각자의 자리의 기억을 남기는 것이다. 어떤 삶과 일치된 지점, 곧 <모비딕>의 끝은 현실과 무대의 경계에 있었다. 그리고 신지호에게는 마지막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는 가운데 온갖 기억들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왔던 것이다. 이 눈물은 역할로서 또 메타 역할로서의 눈물·먹먹함이기도 했다.

    <모비딕>의 한 달 여의 긴 장정이 끝났다. 뮤지컬에서 음악극으로의 시도, 역할role이나 노래singer's song가 아닌 음악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음악의 조종자이자 연주자-역할의 중첩된 자리를 차지하며 목소리를 담아내던 배우들, 바다와 죽음, 그 극복과 삶의 대비된 평면에서 고투하며 뮤지컬 <모비딕>은 소위 ‘음악-공간’에서 뮤지컬의 다른 가능성을 분명히 보여 줬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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