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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러 판을 섞고 짜고 펼치는 기찬 연극’, 오태석의 <마늘먹고 쑥먹고>
    REVIEW/Theater 2012. 4. 10. 12:42

    ▲ 4월 9일 명동예술극장에서 열린 <마늘먹고 쑥먹고> 프레스 리허설 장면(이하 상동)

     

    "사람 된 웅녀가 지금까지 살고 있다면‧ 그 참을성 없던 호랭이가 다시 마늘과 쑥을 먹게 된다면‧", 2012 국립극단 삼국유사 프로젝트의 첫 번째 오태석의 <마늘먹고 쑥먹고>의 몇 가지 가정은 곧장 단군신화부터 현대까지를 관통하는 놀이판으로 이어진다.

     

     

    삼국유사 속 곰이 무당 할미 되어 한반도에서 현재까지 삶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녀가 섬기는 하회마을 허도령은 그녀 딸 순단에게 일제 때 잃어버린 탈 세 개를 백두산에서 찾아오라 한다. 순단은 신발 장수에게 호랑이탈을 씌워 할미와 함께 드넓은 만주벌판을 향해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우러 길을 떠나는 대강의 얼개는 뒤죽박죽 정신없이 판들의 해체와 그 엮음으로 우여곡절 완성된다.

     

    너른 판들의 직조를 바라보며 이 속에 소거된 방대한 텍스트를 재구성하고 엮어 내는 순일한 사유의 판을 짜는 것은 정말 만만치 않다.

     

     

    호랑이가 하늘‧남자‧양의 성질을 띤다면, 곰은 땅‧여자‧음의 성질을 띤다. 연극을 보고 있자니 곰이 인간이 되어 땅에서부터, 어머니의 젖줄에서부터 시작된 우리 부족의 신화는 호랑이를 배제하는 대신 곰과 대구를 이루는 한 축으로 설정하고 있었고, 이는 곰과 호랑이의 인간계에서의 대칭적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갈망으로 이어져 온 것만 같다.

     

    그리고 이 ‘호랑이 알레고리’는 이 연극을 북으로, 또 북한을 넘어 만주 벌판으로 농경민족이 아닌 북방의 유목민족으로 향하게 하며 남북분단에 대한 허리 끊긴 호랑이(통상 우리나라의 지도를 보는 방향을 거꾸로 했을 때 나타나는 형상)의 트라우마 내지 신경증을 치유하고, 인간이 되지 못한 호랑이와의 결합을 통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신화적 상상력의 회복을 꾀하려는 의지와 궤를 이루는 듯하다.
     

     

    마치 곰은 역사의 한을 갖는 미래의 후손을 위해 자신들을 희생한 조상들의 한의 DNA를 간직한 문화의 현재적 표상으로 드러난다. 이는 하나의 신화 차원만은 아니다. 생생한 우리 신체의 한 부분으로 곰은 소급된다.

     

     

    판을 짜는 계속된 의인화된 동물들의 등장은 인간과 결합한 인간의 동물 되기 또는 동물이 인간계로 섞여 드는 것으로, 환웅 부족 같이 오리‧원숭이 등의 부족들이 자연스레 존재하는 신화적 상상력의 영토를 형성한다.

     

     

    연극에서는 무당 할미가 호랑이 남자와 결혼해 외로움을 달래주고자 그녀에게 꿈을 삽입하고자 한다. ‘꿈꾸게 한다’는 말은 극 속에 여러 번 출현한다. 꿈은 하나의 기억이자 현실과 다른 영토로의 접속 창구가 된다. 꿈은 신화적 원동력의 회복 기능을 하는 셈이다.

     

    복잡한 내러티브 같지만 실은 내러티브 자체가 없다. 이는 무한한 평면에서 일부를 절취할 때만(절취가 가능할 때만)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태석 연극은 지하철 요금을 30배 문다는 문구의 삽입 같이 자연스럽게 어떤 말이든 무대에 틈입이 가능한 극작 구조를 띤다. 열린 방식의 말이 말을 불러오는 무대의 이 공기는 그 부분에 대한 집중으로 절취되지 않는다.

     

     

    이 공기는 너르게 펼쳐져 있다. 한 편으로는 신화적 상상력의 무한한 확장의 우리 문화의 신체적‧역사적 단편들의 가상계로, 다른 한편으로는 프로시니엄 아치가 생략된 직접적인 맞닿음의 공기로서 실제적으로 펼쳐져 있다. 이 조건은 이 연극이 집중과 몰입의 (절취로서) 보기 양식을 형성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곧 흘러가는 사유를, 또한 어떤 분위기를 체감하는 것이다. 판은 곧 땅이기도 한데, 바닥에 닿는 발의 감촉은 이 바닥을 땅에 대한 환유의 감각으로 바꾼다.

     

     

    DMZ에 이르러 “철마는 달리고 있다”의 슬로건은 말의 존재들로 나타난다. 말의 단편은 곧장 육체로 연결된다. 이는 은유가 아닌 환유다. 은유를 환유로 곧 연결하는 방식이다. 은유가 A와 B의 인접성을 바탕으로 대리 관계를 이룬다면(곧 이를 B는 A를 기억하며 갈망하는 어떤 욕망을 담고 있다 하겠다) 환유는 A를 B로 치환하는, 곧 하나가 없어지고 하나가 생기는 생성에 가깝다.

     

     

    이 환유는 음악과도 상응한다. 처음 이 타악은 복잡한 내러티브에 대한 해석을 생략한다. 즉 흘러간 악구에 대한 음악적 기억력의 정도, 적어도 우리가 가진 어느 정도의 단기기억으로 추인해 현재 악구와의 비교를 통한 감상과 멜로디에 따른 내러티브의 해석(예를 들면 클래식이 이렇다)을 생략한다. 가령 글을 통해서는 알기 어렵다면 타악의 타점이 갖는, 몸을 바싹 죄는 이 긴장감을 떠올려 보라. 그리고 실제 무대를 보자, 이 생기를 보라. 이는 거부할 수 없는 사운드의 접착이다.(어찌 보면 이 단순한 우리 음악에 대한 상찬은 너무 서구 음악을 편식하는 무대에 대한 대칭적 갈망의 호출에서 쓰임을 인정한다)

     

     

    한편 탈은 모두의 개성을 지운다. 더 정확하게는 무대에서의 존재를 만드는 역할에 투여해야 하는 배우의 개인적인 망설임 따위를 지운다. 영화의 클로즈업에서의 목소리가 아닌(이는 마이크를 통해 따로 절취한다. 동시 녹음 내지 후시 녹음으로써. 즉 엄밀히 말해 영화는 발성이 필요 없다) 표정의 절취는 연극에서는 실상 불완전하다. 곧 연극은 행동과 행동으로서의 말로 진행되며 이 표정을 지움으로써 연기는 공동의 양식을 창조하는 것으로 나아가며 절취된 얼굴이 아닌 탈과 연결된 하나의 신체 덩어리로서 역할들로 치환된다.

     

    곧 개인성은 없다. 다만 개성이 있을 뿐이다. 이 역할로서 뚜렷하게 존재하는 배우들은 이제 어떤 망설임도 없다. 머뭇거림도 없다. 거침없이 발성하고 나아감은 판소리를 닮았고 타악의 타점과도 일치한다. 

     

     

    워밍업을 하는 배우들의 모습은 뚜렷한 시작점을 없애고 관객과의 간극을 해소하며 수행성(배우의 역할의 재현이 아닌 텅 빈 무대를 움직이는 하나의 배우 곧 인간임을 드러내는 행동들)으로부터 연극을 시작하는 계기를 만든다. 역할을 벗고 배우로 돌아가는 묘한 간극의 순간이 커튼콜이라면 오히려 배우에서 역할로(이것이 연극임을, 무대임을 분명하게 언설하며) 자리했다. 이 극 자체로 마무리 짓는 것이다. 곧 다시 연극과 삶의 간극을 드러내면서 이것을 상찬하는 연극의 관습을 깬다.

     

     

    마지막으로 이 판은 신화와 마당의 판 외에도 역사와 사회의 공론장으로서 판으로 기능한다. 북을 향하는 이들의 노정은 사회주의 사상이 제시하는 모두가 자급자족하고 공동으로 재산을 소유하는 것의 순진한 이데아(?)를 되살리는 것과도 상응한다. 개인화된 사회가 아닌 모두가 함께 하는 사회. 반면 이 공동체 집단은 통치 당하는 우매한 민중의, 내지는 북한의 피지배계급의 단면을 직시하게 한다.

     

     

    한 집단을 앉히고 색색의 양말을 번갈아 신게 하는 행위가 그 단적인 예다. 좌파와 우파 그 경계는 지식 차원에서의 일방적인 전달과 교육에서 비롯되며, 끊임없이 무지함을 강조하며 새로운 지식을 강조함은 이 지식의 무용함과 유식한 스승과 무지한 대중을 가리는 잘못된 정치를 표상하며 또한 풍자한다.

     

    사실상 양말은 신발과 달리 왼쪽과 오른쪽의 대상으로 표상되지 않는다. 그냥 어느 쪽이면 먼저 신고 다른 쪽을 신으면 그만인 것이다. 이러한 가볍지만 유쾌한 너스레의 풍자가 시원하게 한국의 상황을 가로지른다. 여기에는 좌청룡 우백호와 같은 풍수의 알레고리, 홍동백서의 문화적 알레고리의 방향성과 한 궤를 이룬다. 이런 시원한 알레고리의 접점들은 한국 문화의 현재 진행형의 DNA를 추출하고 각인하는 오태석의 대단한 장기임에 틀림없다.

     

     

    피 빼고 곰 되고, 마늘 먹고 쑥 먹고 다시 인간 되는 인간과 동물의 순환의 알레고리는 계급 탈바꿈 내지 전환의 현실에 인접하며 ‘마늘‧쑥 인간되기 장치’는 회유 전략의 장치로서 곧 바르트가 말한 또 다른 신화적 장치로 기능한다. 그렇게 이 판에서 신화는 이중의 장치로 기능한다. 하나는 앞서 말한 신화적 상상력의 원동력을 깨우는 장치, 그리고 현실의 신화를 탈신화화하는 풍자와 비판의 거리 두기(-물론 브레히트를 한국적으로 변용한 오태석의 연출법을 가리킨다)적 장치의 기능이 그 다른 하나이다.

     

     

    마지막으로 이 연극의 대사들은 친근하지만 실은 어려운데, 우리말들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일깨운다. 3·4조 4·4조 운율의 대사들의 진행, 곧 시가 노래인 그런 형태가 중간 중간 튀어 나온다. 또한 스토리텔러로서의 걸쭉한 입담과 판소리와 같은 호소적 언어들의 양식들이 펼쳐진다.

     

     

    실상 이 정치적이고 문화적이며 풍자적이고 비판적인 열려 있되 열린 사고를 강조하기도 하는 이 연극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리 만만치만은 않다. 어떤 하나의 원작 텍스트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다양한 해석들과 현실과의 접합과 절합을 낳으며 이 연극이 우리의 텍스트로, 공통의 담론의 중심에 한 축으로 존재하기를 바라본다.

     

     

     

    ▲ <마늘먹고 쑥먹고>의 오태석 연출

    [공연 개요]
    공연명 <마늘먹고 쑥먹고>
    작 | 연출 오태석
    본공연 2012년 4월 10일(화) - 4월 22일(일)        
    시간  화~금 8시 | 토, 일 3시 | 월 쉼 
    장소 명동예술극장 스태프 
    작창, 노래지도 김수연 | 의상디자인 이승무 | 조명디자인 이상봉 | 가면디자인 구세주 | 안무 문근성 | 무대 최기봉 | 소품 박영애 | 무대감독 신용수 조연출 유영욱 | 조연출보 남승연 |
    프로듀서 손신형, 김미선
    출연  정진각,김정환,이수미,한혜수,김진수,김성언,송영광,이은정,최수현,정연주,이주희, 이미숙,윤현길,박준하,이승배,양예지,강영해,한지용,강의모,김성혜,정주현,부혜정, 류동민,김태환,김준범,김용범,윤승인,김륜이,김별하나,백승광,윤민영,정지영
    예술감독 손진책
    제작.주최 (재)국립극단
    티켓 프리뷰 : 전석 1만원 본공연 : 국립극단 다솜석 5만원 | R석 3만원 | S석 2만원         청소년(24세-) 30%할인(R석, S석) | 소년소녀티켓(19세-) 1만원 *8세 이상 관람가
    공연문의 02-3279-2233
    예매  인터파크      www.interpark.com | 1544-1555  국립극단      www.ntck.or.kr l 02-3279-2233명동예술극장  www.mdtheater.or.kr | 1644-2003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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