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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조선 펑크 록커 리성웅展》 읽기 : '전시의 발명', 음악을 전시하다.
    REVIEW/Visual arts 2012. 4. 4. 14:49

    인디 음악과 대중가요의 다른 지평

    ▲ 쾅프로그램, 3월 23일 금요일 저녁, '리성웅의 탄생' 공연에서.

    인디 음악과 대중가요와의 가장 큰 차이는 소비와 스펙터클(보여주기)과 도취되기의 선형적 흐름의 수용이 아닌 현장에서 현시된다는 것, 이것이 하나의 운동으로서 관객과 아티스트의 참여가 뒤섞이는 가운데 수행성의 측면이 제고된다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왔었다.

    한편 인위적인 발성과 교수법에서 유래된 보컬의 절취된 선분이 아닌, 밴드라는 철저한 형식과 수공업적인 연주의 노동이 뒤따른다는 것, 개인이 있는 게 아닌 밴드가, 가수가 있는 게 아닌 현장이 있는 것이다. 이는 관객들과 밴드 간의 내밀하고도 참여적인 장이다.

    ▲ 쾅프로그램

    이 부분이 일견 ‘쾅프로그램’에게는 기타와 외침과도 같은 몽롱한 어구의 박자를 갖춘 신체-악기의 절합articulation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 현장을 감싸고 있는 신체에의 재잘거림으로 수렴되는 사운드라는 추상적이고도(음악의 내용과 메시지, 미학적 취향을 떠나) 실재적인 감각들에는 목소리가 아닌, 연주만이 아닌, 멜로디나 가사가 아닌 '하나의 명확하고 단순한 스타일에 대한 감응'이 유도된다.

    그 중 기타가 내는 사운드에 맞춰 고개를 까딱이며 이 흐름 안에서 자신을 어느 정도 음악을 인식적으로나 이성적으로 향유하는 관객의 무의식적 행위 내지는 제스처는 최소한의 미학적 태도이자 수행의 지점이 된다.

    리성웅의 탄생

    야마가타 트윅스터, 3월 23일 금요일 저녁, '리성웅의 탄생' 공연에서.

    우선 이 날은 신 자체가 달라졌다. ‘현장’이 그 안에 속한 사람의 시선이라면 ‘신scene’은 다른 신과의 차이로 구별되는 특정한 이름 짓기의 결과다. 그래서 이번에는 오히려 미술 신이 시각적 지점의 양상을 확인하기 위한 게 아닌, 이들 밴드의 음악이 시각적 장치 안에 다른 양상으로 구현됨을 확인하기 위해 온, 아니 참여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 더 많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음악은 분명 스토리를 띤 새롭게 전시 문맥에 맞춰 탄생한 음악이다. 가령 물이 분사되는 것 같은 사운드 파국은 온천의 김과 그 의미가 결부되었다.

    팔보채, 3월 23일 금요일 저녁, '리성웅의 탄생' 공연에서.

    팔보채의 일렉트로닉 파장이 갖는 황홀경 음악과 아드레날린의 머리까지 치솟아 점점 흥분시키는 사운드에, 야마가타 트윅스터의 ‘내레이션도 노래도 랩도 아닌 목소리’가 음악에 공명되는 순간들의 흔적으로 지속된다.

    리성웅의 탄생은 일견 ‘역사적’이었다. 이미 이 전시가 죽었음을 전제하는 가상의 리성웅의 탄생에 관한(탄생은 출산의 시점을 가리키는 게 아닌, 리성웅의 정신적인 것이 변화의 전기를 맞음을 상징한다) 재현을 사실 개시된 적 없는 가운데 현시로 바꾸는 차원에서, 역사가 아닌 가상의 어렴풋한 인물을 전시장의 맥락에서 출현시키는 차원에서 리성웅의 탄생은 관객과 퍼포머의 경험적인 사건으로 가시화되는 것이었다.

    야마가타 트윅스터(사진 위)의 춤은 온천에서 몸을 씻는 걸로 전이되어 나타났다. 온천 구조물의 시각적 장치는 단지 ‘여기 있다’는 시간적 흐름의 체험의 장을 미술적 맥락(단지 전시장 안이며 하나의 설치 작품과 교호한다는 의미는 여기서 여전히 유효하다)의 퍼포먼스로의 전유를 성립시켰다.

    일종의 트랜스와 트랜스인 채 트랜스에서 벗어나기(또 다른 트랜스로 도약하기), 실재의 감각들에서 그 빠져 나간 트랜스의 흔적들을 지속시키기의 음악은 꽤 길게 지속됐고, 묘연한 행방으로 유도되는 듯했다. 야마가타 트윅스터는 온천에서 그리고 전시장에서 빠져 나왔고, 이날 전시가 시작됐던(줄을 서서 전시장 바깥부터 전시장에 들어가기를 기다리던 관객들; 이런 부분 역시 특이한 경우로 볼 수 있다. 전시장은 순간적으로만 전시장이 되는 것이다) 곳으로 거꾸로 나갔다. 곧 전시장의 문맥은 확장됐고, 그 경계가 흐트러뜨려졌다.

    리성웅의 활동 첫 번째 : ‘악어들’


    ▲ 악어들, 4월 1일 일요일 저녁 '리성웅의 활동' 공연에서.

    단출한 멜로디가 좋았다. 정확히는 멜로디-박자의 한 단위로 분절된 악구들이 입체적으로 흐트러뜨려져 입혀져 반복되는(거의 변화 없지만 강한) 리듬 체계를 형성해 나간다고 보는 게 맞을 듯한데, 여기에는 목소리는 웅크려들 듯 거칠고 뇌쇄적인 빛을 발한다. 어떤 하나의 분명한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가운데, 그는 거기에 침잠한다. 그의 머리가 그의 눈을 덮듯. 그 가운데 뭔가 낭만적이고도 이국적인 부분이 있다.

    네 곡을 선보였지만 곡의 분위기들은 전혀 다르다. 공통된 것은 반복 어구들의 형성이 쌓여 가기보다는 휘발되며 강한 인상으로 사라진다는 것인데, 결과적으로 그 묘연한 분위기에 대한 감응만이 남게 된다.

    미술관에 관한 해체적 시선


    ▲ 악어들, 4월 1일 일요일 저녁 '리성웅의 활동' 공연에서.

    미술관에서의 음악 공연 리뷰라, 이건 뭔가 그 전도의 정도가 지나친 것일까, 아트선재센터, 곧 아트센터로 명명되는 이 공간의 정체성은 이 사운드의 반향과 격정적인 연주, 이에 반응하는 관객들을 품는 텅 빈 공간으로 변모했을 때(물질의 전시가 아닌 비물질을 위한 사람과 사람의 교류만이 남았을 때), 그릇과 용기 간에는 어떤 공통점도 찾을 수 없는 들뢰즈의 사유적 지점은 미술관이 미술을 감싸는 공간이라는 허구를 거꾸로 드러내는 비판적 지점으로 연장된다.

    공간은 따라서 특정한 무엇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닌, 어떤 것을 채움으로써 달라지는 차이의 생성으로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생성은 미술이라는 장르적 영역을 미술관에서부터 해체할 수 있는 지점이 되는 것일까.

    한편 이 공간은 반드시 물리적이고 실제적인 공간인데, 특별한 무대가 이번 전시에서도 놓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리고 원래 텅 빈 공간으로 놓인 것이라는 점에서 공간의 중앙이나 내지는 어느 정도 테두리를 칠 수 있는 공간으로, 곧 관객들이 둘러싼 공간으로 무대가 자연 형성되었다고 보인다.

    ▲ 서교그룹사운드, 4월 1일 일요일 저녁 '리성웅의 활동' 공연에서.

    다시 돌아와서 ‘음악의 전시’(; 백남준의 첫 개인전은《Exposition of Music》, 곧 음악의 전시였다)는 음악 그 자체인가, 내지는 음악적 전시인가, 중요한 건 기존의 전시 개념이 해체되고 있다(가령 전시 주체가 바뀌고 콘텐츠의 펼침이 달라진다는 점에서)는 점과 장르에 따른 그를 담는 용기의 경계가 확장된다는 점이다.

    한편 이 미술관을 오전부터 오후까지 여러 일에 걸쳐 벌어지는 ‘너른 분포의 관객’을 형성하는 대신 이 퍼포먼스로써 완성되는 전시는 집약적인 만남과 특정 시공간의 형성이라는 시간 차원의 문맥이 공간을 가르고 교차(그럼에도 전시는 평상시에도 너른 분포의 관객들을 받고 있다는 점)하게 되어 있다.

    ▲ 서교그룹사운드

    어떤 물질 형태에서 비-물질로 치환되는 전시 형태의 나눔은 밴드로서는 공간에 대한 제약이 순수하게 줄어든 셈이며, 이는 공통된 나눔의 차원이자(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들 간의)역설적으로 음원이라는 물질 형태의 공유로 다시 전환되어 하나의 음반을 구성하게 된다. 한편 참여 밴드들의 노래는 아트선재센터 전시 소개 페이지의 링크를 따라 공개되어 있는 음원들로 다시 접할 수 있는데, 우선 음악들이 굉장히 좋다.

    ▲ 공연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선 관(람)객들.

    물질 형태의 일반적인 전시를 간소화한 물질과 충만한 비-물질의 결합으로 전환되며 전시 하나가 네 번의 콘서트(한 시간 반이 조금 넘는 가운데, 일반적인 인디 밴드의 콘서트와 비슷하거나 약간 그 시간이 적다/기존 전시 요금인 3000원을 내고 하나의 붉은 배지를 받으면 공연에 계속 입장할 수 있다)에 대한 비용과 음반의 값을 상쇄한다면, 이는 그림의 물질 형태의 예술 이전에 유목적인 생활 방식의 삶에 육체에 각인해 공유하던 춤과 음악의 그 간소함의 예술 형태가 전시 시스템에서 성공적이고 현실적으로 새롭게 피어나는 맥락을 선사하지 않는가.

    물질이 길게 이 공간에 들어서 붙잡고 있다면, 전시장을 유동적으로 구현하는 것. 이는 미술관의 구조와 시스템 자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서교그룹사운드, 노컨트롤


    ▲ 서교그룹사운드, 4월 1일 일요일 저녁 '리성웅의 활동' 공연에서.

    서교그룹사운드의 공연에는 소위 ‘떼창’(관객들이 동시에 노래를 따라 부르는 반응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떼 손뼉’과 한 쪽에서는 뜀박질 집단이 이뤄졌다. 격렬한 기타 연주가 인상적이었는데, 내레이션 같은 자기 서술로부터 시작해서 이 노래는 보컬과 연주가 늘어지듯 연장되고 확장되며 고양에 치닫기보다 은근한 여운의 대기에 침잠되는 듯한 느낌을 준다.

    ▲ 노컨트롤, 4월 1일 일요일 저녁 '리성웅의 활동' 공연에서.

    패널로 가로막혀 있는 전시장 한 편에는 각종 음악적 장치들이 있었는데, 노컨트롤이 설치한 것임이 밝혀졌다. 라디오 주파수를 쏘는 장비가 그 안에 있고, 이 곳은 리성웅의 도피 생활에서 그의 아지트로 상정된 공간이다.

    칸막이(패널)가 처진 공간 안에서 끝없이 치닫는 소리는 그 안에서 수렴되며 하나의 소리가 분출되어 나오는 공간을 만들었다. 노컨트롤의 음악은 퍼져나감, 분별할 수 없는 언어들, 사운드 매질 그 자체의 파도 같은 흐름이 감각됐다. 이에 대해 홈이 파인 것(공간)과 매끈한 것(공간)의 행위(공간)의 대별되는 두 개념을 정의했던 『천 개의 고원』의 들뢰즈의 의견을 참조해 볼 수 있을까. 홈이 파인 것은 ‘고정된 것과 가변적인 것을 교차시켜 서로 구별되는 형식들에 질서를 부여하고 연속적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매끈한 것은 ‘연속적 변주와 형식의 연속적 전개, 리듬에 본래적인 독자적 가치를 이끌어내기 위한 화음과 선율의 융합’이다.

    그렇다면 사운드와 목소리, 노이즈가 섞이며 다시 너른 하나의 공간‧평면을 만드는 것(음악에 목소리로 홈을 파는 기존의 음악 형태가 아닌)은 홈 파인 음악을 매끈한 음악으로 재영토화하는 행위와 가까울 것이다.

    이 세 팀 공연의 배치는 매우 자연스럽다. 곧 밀도가 높아지는 순의 배열이다. 내지는 홈에서 매끄러운 것으로 가는, 이 공간 자체에 목소리가 무화되는 과정일 것이다. 이제 《아트선재 오픈 콜 #1 : 북조선 펑크 록커 리성웅》은 마지막 공연, 13일 금요일 오후 7시 ‘무키무키만만수, 밤섬해적단, 파렴치악단, 파블로프’가 출연하는 ‘리성웅의 몰락’ 공연만을 남겨 두고 있다.

    ▶ 관련 기사 더 보기 : ‘인디 신’의 공연기획자들, 가상의 북한 인물을 전시로 구성하다...《북조선 펑크 록커 리성웅》전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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